[데스크 칼럼] 위기의 원천과 신뢰의 밑천
세기적 대전환기가 맞나 보다. 익숙하지 않은 뉴스들이 연일 쏟아진다. 부패 정치로 유명한 이탈리아에서 헌법 개정을 위한 ‘개혁’이 시도됐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곧바로 부결됐지만 말이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도 불과 엊그제 일이다. 예상치 못한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에 이어 우리 눈앞에선 거대한 촛불 물결이 정치권력 자체를 바꿔 놓고 있다.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역사를 변화시키는 힘이 자라난 까닭은 무엇일까. 혹자는 이렇게 답한다. “깊게 드리워진 저성장의 그늘이 돌이킬 수 없는 저항을 잉태했다”고. 다른 버전도 있다. “금융위기 이후 선진 각국이 경쟁적으로 추진한 양적완화가 문제였다”고 한다. 역사상 최대 규모로 돈을 풀다 보니 자산 버블, 식품과 원자재 가격 급등, 실질소득 감소, 소득 양극화, 기존 체제에 대한 신뢰 붕괴 등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비약은 아니다. ‘채권왕’ 빌 그로스도 동의했다. 그는 양적완화로 인한 초저금리가 오래 지속되면 폰지게임(금융 다단계 사기수법)을 부를 수 있다고 했다. 초저금리는 땅, 금 등 실물자산을 가진 사람들만 이롭게 하고 은행이나 보험사에 맡겨둔 노후 연금자산은 바닥을 드러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경제 석학 폴 크루그먼도 같은 생각이다. 그는 2013년 이런 글을 썼다. “2009년 이후 경제 회복의 결실 중 95%가 소득상위 1%에게 흘러갔다. 절대다수의 미국인은 여전히 침체 늪에서 허덕이는 동안 부자들은 손실을 거의 회복했다.” 양적완화로 풀린 돈이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몰리면서 자산가들의 부(富)가 늘었기 때문이다. 수년 전 ‘월가 점령 시위’는 이런 역사에 대한 반동(反動)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지금은 금리 인상을 ‘걱정’해야 하는 시점이다. 15일 결정된 미국 중앙은행(Fed)의 기준금리 인상은 새로운 위기 요인이다.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라’는 경고도 적지 않다. ‘상승’으로 기수를 돌린 금리는 경제 전반에 충격파를 던질 가능성이 크다. 한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은 경기 회복 효과도 못 봤는데 금리 상승이란 ‘태풍’에 대비해야 해 더 부담이 크다.

정확히 20년 전 미국의 금리 상승은 신흥국 자산 가치를 급락시켜 외환위기의 단초를 제공했다. 그런 기억이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한다.

대통령 탄핵안 가결 이후 국내 증시는 오히려 올랐다. 외국인 자금의 갑작스러운 유출 움직임은 아직 없다. 외환시장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탄핵안 가결로 단기 불확실성이 해소됐다는 긍정적 평가의 영향이다.

그러나 “국정 공백이 장기화될 경우 원화 약세와 경기 침체 리스크가 우려된다”(골드만삭스)는 지적은 되새길 만하다. ‘국정 공백’이 심화될 조짐이 보이면 외국 투자자금의 ‘탈(脫)한국 러시’가 현실화할 수 있다는 경고다. 중첩된 위기 앞에서는 우리가 주인이 돼 조정 가능한 갈등 요인부터 우선 풀어야 한다. “국회가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내년 예산안을 통과시켰다”(무디스)는 식의 ‘팩트’와 평가들이 계속 나와야 한다. 그래야 한국에 대한 신뢰의 밑천을 나라 밖에서 두둑이 쌓을 수 있지 않겠는가.

장규호 증권부 차장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