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언각비] '짜구나다'의 등장
학술서적 전문 출판사인 일지사를 설립한 고(故) 김성재 선생은 한국 출판계의 거목이었다. 그는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1951년 학원사의 전신인 대양출판사에 입사하면서 평생의 업이 된 출판에 발을 디뎠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돼 회사에서 중학생용 학습참고서 제목을 사내 공모했어요. 대부분 ‘최신’ ‘모범’ ‘표준’ 등이었는데 저는 ‘간추린’이란 제목을 냈습니다. 당시 이 말은 서울에선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막상 사내 투표를 해보니 압도적인 표 차로 ‘간추린’이 채택됐죠.” 한 시대를 풍미한 ‘간추린~’ 시리즈는 이렇게 탄생했다. 참고서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말 자체도 널리 알려졌다. 그전까지만 해도 ‘간추리다’는 영남권에서 쓰던 사투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 말이 사전에 오른 사연은 더 극적이다. “1958년에 나온 한 국어사전 교정을 제가 했어요. 그때 이 말이 생각나 슬그머니 집어넣었습니다. 교정자로서는 월권행위였지만 시리즈 덕분인지 이후 사전마다 올랐습니다.” 2005년 타계한 선생은 생전에 신문 기고 등을 통해 이런 일화를 회고했다.

선생의 우리말 사랑은 남달랐다. 사투리를 비롯해 잘 알려지지 않은 순우리말을 많이 발굴했다. 1956년 일지사를 세운 뒤 직접 쓰고 펴낸 첫 작품이 《오달진 국어연구》다. ‘오달지다’는 야무지고 알차다는 뜻의 고유어다. 그 전엔 《알기 쉽게 간동그린 한글맞춤법》(1953)을 썼다. ‘간동그리다’는 말끔히 가다듬는다는 뜻이다.

“여그 거시기는 한마디로 머시기할 때꺼정 거시기한다!” 영화 ‘황산벌’에서 백제 진영을 염탐하던 신라군은 ‘거시기’가 암호인 줄 알았다. 당황한 신라군은 암호 전문가까지 불렀지만 도저히 풀지 못했다. 애초 호남 방언이던 이 말은 《표준국어대사전》(1999)에서 표준어로 올렸다. 하지만 요즘도 이 말을 사투리인 줄 아는 사람이 많다.

얼마 전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말한 ‘짜구나다’도 영호남 사투리다. 너무 많이 먹어 배탈이 날 지경을 이를 때 쓴다. 웬만한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한글학회의 《우리말 큰사전》에서는 ‘자귀’의 사투리로 풀었다. ‘자귀가 나다’란 관용구로 쓰인다. ‘자귀’는 ‘개나 돼지가 너무 많이 먹어 배가 붓는 병’이다. ‘짜구나다’는 ‘최순실 사태’에 묻혀 그리 주목받지 못했지만 우리말을 풍성하게 하는 소중한 지역어다. 사투리도 자꾸 써야 우리말이 발전한다.

홍성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