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문제 유출
미국 대학에 지원하려면 대학입학 자격시험인 ACT(American College Testing)나 SAT(Scholastic Aptitude Test)를 치러야 한다. 우리나라의 수능시험 격이다. 지난해 미국 고3 학생 360여만명이 이 시험을 봤다. 세계 130개국에서도 응시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ACT가 인가한 국제학교, 외국어고 등 26곳에서 치른다.

문제는 시험지 유출 사고다. 아시아 지역, 그중에서도 한국에서 유독 사고가 자주 터진다. 지난달 22일 시험에선 작문 주제가 유출돼 아시아 전체의 해당 과목 점수가 일괄 취소됐다. 6월11일엔 국내 일부 시험센터가 문제 상자를 미리 뜯어 유출하는 바람에 당일 아침에 시험이 전격 취소됐다. 브로커들이 거액을 제시하며 ‘작업’을 한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보다 못한 ACT 측이 강경책을 내놨다. ACT는 홈페이지를 통해 “다음달부터 기존의 한국 시험장을 모두 없애고 본사가 지정한 한 장소에서만 시험을 치르며 감독관도 우리가 직접 파견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만을 겨냥한 ‘중대 발표’다. 종이상자를 밀봉형 플라스틱 가방으로 바꾸고 비밀번호 자물쇠를 다는 보완 대책으로도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내 시험센터 관계자들에게도 “이번 조치는 한국에서 반복되는 시험 부정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며 “내달 10일로 예정된 시험은 서울의 한 호텔에서 치르겠다”고 통보했다. 시험장이 한 곳으로 통합되면 지방 학생 등이 불편을 겪는 건 물론이고, 국가 이미지가 나빠져 유학 전형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안타깝지만 자업자득이다.

SAT라고 다를 게 없다. 2013년 서울의 유명 어학원들이 문제를 빼내 수강생들에게 팔아넘긴 것 때문에 한국에서만 시험이 취소됐다. 한 어학원 강사는 태국에서 시험지를 빼돌린 뒤 시차 때문에 12시간 뒤에 치르는 미국의 한인 유학생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토익(TOEIC) 시험장에서 강사와 로스쿨생이 정답을 초소형 카메라로 찍어 전달하는 첨단 수법까지 등장했다.

영어 시험뿐만 아니다. 검사 임용시험에 합격한 예비 검사가 로스쿨 재학 때 문제를 빼돌려 고학점으로 졸업한 이력이 밝혀져 충격을 줬다. 교수의 PC 속 문제를 빼내 장학금을 받은 수의학과 학생도 있었다. 이들이 법관이나 검사, 의사가 되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겁난다. 요즘 나라 꼴을 보면 더 그렇다. 이런 ‘편법 사회’, ‘꼼수 사회’의 후진성에서 언제나 벗어날 수 있을까. 안팎 가리지 않고 새는 바가지라니!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