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창] 꺼림칙한 곡조의 '일본판 용비어천가'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움직이지 않아 꽃 좋고 열매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그치지 않아 내를 이루어 바다에 가나니….’ 조선 개국의 명분과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지은 용비어천가다. 지금 일본에서도 용비어천가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일본 개국은 아니지만, “아베 총리시여, 오래 집권하소서” 하는 합창이 난무한다. 합창단 지휘대장은 자민당 정치제도개혁 실행본부장인 고무라 마사히코(高村正彦) 부총재다. 실행본부는 지난 19일 임원회의에서 당총재 임기 연장을 결정했다. ‘연속 2기 6년까지’로 돼 있는 현행 임기규정을 ‘연속 3기 9년까지’로 바꾸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고무라는 의원내각제 주요국(G7) 여당 대표의 임기규정이 없다는 점을 들어 “이치로 보면 임기제한 철폐가 마땅하나 자민당은 총재 임기를 조금씩 연장해왔다. 3기 9년이 여론에서도 받아들여지기 쉽다”며 팡파르를 울렸다. 2018년 9월에 끝나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자민당 총재 임기를 2021년 9월까지로 연장하겠다는 노림수다.

자민당은 1955년 창당돼 아주 일부 시기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집권당으로 군림해왔다. 일본은 여당 총재가 총리가 돼 통치하는 내각책임제인지라 자민당 총재 임기 연장은 사실상 총리 임기 연장을 뜻한다. 임기 연장 결정 배경에 아베 총리의 꿍꿍이속이 담겨 있음은 물론이다. 일본 총리 재직 기간 역대 1위는 한반도 식민지 점령을 위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장본인으로 유명한 가쓰라 다로(桂太郞)다. 아베가 2021년 9월까지 총리 자리에 있으면 장장 3500일을 넘어 가쓰라의 재직 기간 2886일보다 훨씬 긴 최장수 총리가 된다.

제2차 세계대전 패배 후 미국 주도로 만들어진 헌법을 일본은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장기집권하며 자신의 힘으로 헌법을 고쳐보겠다는 아베 총리의 속내가 여기저기 묻어난다. 그의 정치적 포부를 담은 저서 《새로운 나라로》에는 헌법 개정에 대한 의지가 절절히 배어 있다. ‘최장수’ 총리로서 ‘최초’로 헌법을 개정한다면 역사에 길이 남게 될 터이니 그 속마음이 어찌 고무되지 않겠는가.

아베는 2006년 9월 총리가 됐다가 1년 만에 물러난 쓰라린 경험이 있다. 절치부심하며 딛고 일어나 2012년 말 그는 정권 재탈환에 성공했다. 지금은 정치 단수도 높아져 자민당 내 국회의원을 공깃돌 주무르듯 한다. 공천을 받지 못하면 의원직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자민당 국회의원들은 알아서 기고 있다. 견제는커녕 잘못을 잘못이라 지적할 수 없는 숨 막히는 기운이 감돈다. 전전긍긍 총리 관저 눈치 보느라 “장기집권은 위험합니다”라는 소리 한마디 내지 못한다. 반대파의 저항은 대답 없는 메아리로 사그라진다.

일본이 아베 총리를 향해 용비어천가를 부르든, 헌법 개정을 해 국방군을 갖든 우리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염려되는 일본의 병폐는 한쪽으로 대세의 시계추가 쏠리면 쏠린 시계추를 자력으로 되돌리기 어렵다는 점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제국주의로 내달아 한반도를 식민지화했고, 허수아비 괴뢰국가 만주국을 세웠고, 중일전쟁을 일으켰으며, 종국에는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가로 치달았다. 전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일본의 헌법 개정 운운은 그들의 과거 전력(前歷)을 주마등처럼 떠올리게 해 우리는 심히 불안해진다. 일본판 용비어천가가 꺼림칙한 곡조로 다가오는 이유다.

국중호 < 일본 요코하마시립대 경제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