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폴리페서들에게 바치는 노래
조윤제 교수는 관변 학자다. 스탠퍼드대를 졸업한 이후 줄곧 관변에서 경력을 쌓았다. 국제통화기금(IMF) 경제분석관을 지냈고 기획재정부 장관 자문관을 역임했다. 서강대 교수였지만 생애에 걸쳐 정부 관료들과 크고작은 정부 일을 해 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중 청와대 경제보좌관과 영국 대사를 지냈다. 노 전 대통령은 “조 보좌관의 보고서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며 칭찬했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국민경제자문회의 외에는 별다른 책임 있는 공직을 받지 못했다. 한국은행 총재 하마평에 올랐지만 낙마했다. 아쉬움은 기대치의 함수다. 그래서일까. 이번에는 아예 문재인 싱크탱크의 수장을 맡으면서 정치 전면으로 돌아왔다. 하나의 모범적, 표준적 이력서다.

바야흐로 폴리페서의 시대가 돌아왔다. 망둥이가 따라 뛰고 철새는 날아오른다. 관변 교수로서는 큰 대목이 서는 상황이어서 괜스레 마음들만 부산하다. 물론 공부는 제쳐놓은 지 오래다. 캠프에 들거나 아니면 종편에라도 출연해서 진영을 짜야 한다. 혹 연구서를 쓰더라도 가능한 한 쉽게, 정치가들의 귀에 쏙 들어갈 언어를 써야 한다. 정치가 목표를 정하면 그들은 수단을 제공한다. 때문에 필시 기회주의자가 된다. 한국에 유달리 폴리페서 전통이 깊은 것은 관학(官學)의 전통 즉, 유학의 나라였기 때문일 것이다. 좋게 말해도 관존민비의 세계에서는 제왕의 부름을 받아 정치에 나서는 것이 지식인의 유일한 활로다. 선비라고 해봤자 한양을 향해 목을 길게 빼고 임금이 들을 때까지 사모곡을 불러대는 위선적 존재다. 전국에 무슨 무슨 고개에 얽힌, 목 놓아 임금을 그리워했다는 전설만 모아도 조선의 인물론을 망라한다. 주자학 일원론의 세계에서는 대립하는 사상들 간의 내적 정합성, 다시 말해 이념 정당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 풍토가 이념 대결이 선명한 지금까지 이어진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관학 일원론의 오랜 전통이다.

아마도 첫 폴리페서라고 한다면 고(故) 남덕우 경제부총리일 것이다. 위대한 업적을 쌓은 분을 폴리페서 반열에 올리는 것이 죄송스럽지만 당시 관료들은 남 부총리를 줄곧 “남 교수!”라고 부르며 빈정댔다. 조순, 정운찬 교수로 이어지는 서울대 경제학과 학맥도 폴리페서 계보를 잇고 있다. 폴리페서 이상이 되고자 했던 사람도 많았다. 조순, 정운찬도 그럴 것이다. 한완상, 박승 교수도 이번에 문재인 캠프에 이름을 올렸다. 80대 폴리페서라니! 숨이 턱 막히지만 확실히 고령화 시대다. 그들에게는, 무너져 내리는 노년의 영혼을 노래한 세네카의 노래를 들려주자. ‘시대 지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문재인 캠프 교수가 이미 500명이고 2차로 500명이 또 이름을 올린다는 것이니 정치는 교수들의 세 대결인 모양이다. 더불어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도 기정사실인 것 같다. 1000명이나 되는 교수들이 땅을 치며 후회할 일이 생기면 미안해서 어떻게 하나.

문제는 사상의 정향이며 이념과 철학이다. 폴리페서들에게는 그게 거추장스럽다. 그러나 다행히 김종인 이후 모든 것이 면책되고 있다. 그는 더민주에서 박근혜 캠프로, 다시 더민주의 지휘봉을 잡아 스스로 역대급 ‘전문가’로 변신했다. 경제민주화라는 간판이나마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은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 한번 철새가 용인되자 모두가 철새가 돼 온 들판이 어지럽다. 탈이념에 포스트모던이다. 이념의 분열과 대립이 이토록 격렬한 나라에서 대선 캠프들은 거꾸로 이념의 무정부, 다시 말해 온갖 종류의 기회주의자들로 가득하다. 그러니 정치는 허무주의의 성찬이다.

그러나 기억하시라. 기용되더라도 곧 버림받는다는 사실 말이다. 한때의 김광두는 사모곡 쓰기를 진즉에 포기했고, 홍기택은 기쁨은 짧고 슬픔은 긴 떠돌이 생활이다. 윤여준처럼 아예 기술자를 자처하고 나면 마음이 편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뿔싸, 수명은 길어졌지만 각자의 인생은 너무도 짧다. 더 늙어지기 전에, 제정신에 후회할 시간 정도는 남겨두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폴리페서들이여!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