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첩첩산중 한국 경제
얼마 전 크지는 않지만 튼실한 기업을 경영하던 기업인이 팔 수만 있다면 회사를 팔고 편하게 살고 싶다는 하소연을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항상 긍정의 마인드로 기업을 운영하던 존경받는 기업인이었는데 뭐라 위로할 말이 없었다.

최근엔 경제전문가 사이에서조차 한국 경제에 큰 위기가 오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들이 많다. 그때마다 “위기 걱정을 많이 하면 그건 위기가 아니라는 뜻”이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지난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공공연맹노조가 모여 ‘공공부문 성과연봉제 반대’ 공동 파업을 선언하면서 내건 구호를 보고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노동시장 개악 분쇄, 구조조정 중단, 박근혜 정권 퇴진’ 구호에서 노동시장을 ‘노동법’으로, ‘구조조정’을 ‘정리해고제’로, ‘박근혜 정권’을 ‘김영삼 정권’으로 바꾸면 20년 전인 1996년 같은 장소에서 민주노총이 외쳤던 구호와 판박이다.

1997년 외환위기 때는 경제의 펀더멘털은 튼튼한데 유동성 위기에 몰렸다는 변명이 통했다. 그런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예상됐던 해운업 구조조정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한진해운이 법정관리로 가는 것을 보니 1997년 한보철강이 법정관리로 갈 때와 꼭 같은 상황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기획재정부 설명처럼 작금의 경제 상황은 ‘과소비, 과잉 투자, 원화 강세로 인한 구조적 경상수지 적자와 부실 누적’으로 인한 외환위기 때와는 다르다.

하지만 최근 한국 경제는 실물부문의 위기 가능성이 더 크고 대외 여건도 더 불리하다. 외환보유액 등 대외지급능력지표들이 개선됐다고는 하나 위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는 수준으로 보기에는 자본시장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지난 8월 말 현재 외환보유액은 3754억6000만달러로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하고 있다고 하나 국제결제은행(BIS)은 필요외환보유액을 연간 수입액의 4분의 1(상반기 기준 평균 925억달러), 단기외채(6월말 기준 1068억달러), 그리고 외국인 주식 및 채권투자자금의 3분의 1(1308억달러)을 합한 금액으로 보고 있다. 이 기준으로 본다면 외환보유액이 부족한 수준은 아니지만 크게 안심할 수준도 아니다.

국가신용등급도 허망하기는 마찬가지다. 외환위기 당시에도 한국의 신용등급을 신용평가회사들이 높이 평가했지만 위기가 나자마자 폭포처럼 하락했다. 신용등급 상향 조정이 위기 시의 안전보장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국가 신용등급은 주로 신용위험 지표에 초점이 맞춰지므로 실물경제 동향이나 체감경기와는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출 증가가 아닌 내수 부진에 의한 불황형 경상수지 흑자 역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큰 폭의 경상수지 흑자는 외환위기의 빌미가 된 당시 경상수지 적자 누적에 비하면 분명 긍정적인 요소이긴 하다. 하지만 ‘불황형 흑자’가 지속되면 원화 강세를 부추기고 이것이 기업들의 수출경쟁력과 수익성을 거세게 위협하면서 다시 수출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과도한 원화 공급을 유발시켜 부동산 투기 등 비생산적 부문으로 자금이 유입되면서 경제에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기도 하다. 결국 수출 증가가 아니라 내수 부진으로 발생하는 작금의 경상수지 흑자는 원화 가치 절상을 통해 수출마저 더욱 위축시키면서 심각한 축소형 불황을 초래할 수 있다.

한·중 간 기술 격차가 축소되고 있고 미래 성장 산업을 발굴하지 못한 상태에서 외환위기 때처럼 기업들의 실적 부진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금리 인상이 연내 적어도 한 번은 있을 것이고 향후 수년간 이어질 것이다. 중국 경제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한국 경제는 휘청거리는 중국 경제에 묻혀 허우적거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장기화되는 저성장 기조 하에서 성장모멘텀을 찾기 위해선 과감한 사업 재편과 규제개혁, 노동시장개혁 등 구조개혁이 필요한데 관련 법규 개정에 앞장서야 할 국회는 이번 국정감사에서도 기업인들을 불러 호통이나 치는 일이 재연되고 있다. 과도한 비관론은 경계해야 하는 것이 분명한데 나도 모르게 기업가의 한숨이 전염되고 있는 것 같다.

이인실 < 서강대 교수·경제학 insill723@sogang.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