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크림 반도
우크라이나 남부 초원을 거쳐 흑해의 쪽빛 바다로 툭 튀어나온 크림반도. 다이아몬드를 닮은 이곳에 ‘흑해의 보석’으로 불리는 휴양도시 얄타가 있다. 배를 타고 조금만 가면 해안 벼랑 끝에 뾰족 솟은 제비둥지성도 볼 수 있다. 16세기 초 한 장군이 전쟁포로로 잡힌 여인의 미모에 반해 지어준 별장인데 1927년 대지진으로 절벽이 부서져 지금처럼 위태로운 모습이 됐다고 한다.

강원도 넓이에 인구 240여만명인 크림반도에는 이런 관광명소뿐만 아니라 체호프를 비롯한 대문호의 흔적이 많다. 러시아 황제가 지은 궁전에서는 1945년 역사적인 얄타회담이 열렸다. 연합국 정상들이 전후 독일 분할점령과 한반도 남북의 미·소 신탁통치안을 논의하던 장소도 관광지가 됐다.

19세기 중반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맞서 오스만제국·영국·프랑스 연합이 벌인 크림전쟁의 전장도 여기다. 그 때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활약했다. 예로부터 지정학적 가치가 커서 열강들의 각축장이 됐던 크림반도는 최근의 우크라이나 사태 때문에 또다시 ‘화약고’가 될 운명에 처했다.

이 땅은 옛날 스키타이와 로마, 몽골, 오스만제국,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원주민인 타타르족은 2차 세계대전 때 소련에 맞섰다가 스탈린의 강제이주 보복을 당해 지금은 전체 주민의 15%밖에 안 된다. 60% 정도 되는 러시아계는 이곳이 수백년간 러시아 땅이었으니 이참에 러시아와 합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25%를 차지하는 우크라이나계는 타타르계와 함께 합병을 결사 반대한다. 인종 문제까지 겹쳐 이래저래 복잡한 상황이다.

수도 키예프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계 주민들이 친서방 노선을 강행하자 러시아가 급기야 군사행동을 준비하고 있다. 러시아로서는 크림반도가 흑해함대 주둔지이기에 매우 중요하다. 부동항(不凍港)인 세바스토폴에 230년간 자국 함대를 주둔시킨 결과 터키 북부와 지중해, 중동, 발칸반도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흑해기지 임대료로 우크라이나에 천연가스를 지원하고 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크림반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의 새로운 뇌관이 돼버렸다. 군사 전문가들은 “지금이 러시아가 조지아와 5일간 전쟁을 벌였던 2008년을 연상시킨다”고 말한다. 뱅크런(대량 예금인출 사태)이 발생하고 러시아 루블화 가치가 하락하는 걸 보면 조지아 사태 때와 비슷하다. 이러다 진짜 유럽 지도가 바뀌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벼랑 끝에 선 제비둥지성의 모습도 더 위태로워 보인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