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신제윤 금융위원장의 편견
며칠 전 금융계 원로 한 분을 만났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분이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내심 KB금융지주나 우리금융지주 회장 자리에 관심이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덕담을 겸해서 “한 번 도전해 보시지요”라고 했더니 “에이, 나는 줄이 없잖아”라며 껄껄 웃었다.

‘줄대기 계절’이 돌아왔나 보다. 우리금융과 KB지주 회장을 둘러싼 소문이 벌써부터 무성하다. 아무개가 내정됐다느니, 아무개가 유력하다느니 등의 말이 돌아다닌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이름 앞에 꼭 수식어가 붙는다는 점이다. 박근혜 대통령 후보 캠프에서 일했다거나, 박 대통령과 대학 동문이라거나,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상당한 공을 세웠다거나 하는 말이 따라 다닌다. 금융산업에 대한 철학이나 경영능력은 거론되지 않는다.

내부 인사는 믿지 못하겠다?

신제윤 금융위원장도 이런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한 달 전에는 “관치(官治)가 없으면 정치(政治)가, 정치가 없으면 내치(內治)가 판을 친다”고 한탄하더니, 엊그제는 “금융권에 계시는 분들이 사회적으로 보면 먹고 살 만한 분들인데, 너무 인사에 민감한 것은 좀 그렇다”는 경고성 발언을 날리기도 했다.

신 위원장의 시각은 상당히 옳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른바 ‘4대 천왕’만 봐도 그렇다. 정치 실세들의 후광에 힘입어 은행 임원 자리에 오른 사람도 부지기수다. ‘회장파’와 ‘은행장파’로 나뉘어 밤낮으로 으르렁거리는 것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신 위원장의 발언엔 편견이 깔려 있다는 느낌이다. 은행 내부 인사들에 대한 불신이다. 내부 인사에게 맡겨 놨더니 서로 헐뜯고 싸우기만 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듣기에 따라선 정치권에 줄대는 것도 안되고, 내부 출신도 못 믿겠으니 관(官)에서 사람을 간택하는 게 낫다는 쪽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외환위기 이전만 해도 국내 대형은행 은행장은 정부가 낙점했다. 5대 시중은행장을 공무원 인사하듯이 한꺼번에 발표하기도 했다. 그래도 대부분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행장이 됐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외환위기 이후다. ‘은행 산업을 말아먹은 장본인’으로 내부 출신이 지목되면서 화려한 경력이나 힘을 가진 외부 인사들이 은행장이나 지주회사 회장이 됐다. 윤병철 황영기 이팔성 우리금융 회장, 이덕훈 박해춘 우리은행장, 어윤대 KB지주 회장, 강정원 국민은행장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금융지주사의 틀을 잡는 데 기여했지만, 끊임없이 내부 갈등을 유발하면서 금융지배구조 자체에 의구심을 품게 했다.

자격 없는 '낙하산' 막는게 우선

금융지주사 회장을 내부 출신에서 골라야만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외부 인사와 내부 인사에 차별을 두지 말았으면 한다. 오롯이 누가 해당 금융회사 발전에 기여했고, 앞으로 더 기여할 것인지를 판단기준으로 삼도록 맡겨 뒀으면 한다. 금융당국은 정치권과 권력 실세들의 줄을 잡고 낙하산으로 오려는 사람들을 철저히 차단하고, 회장으로 뽑혔다고 해도 문제있는 것으로 판단될 경우 수시로 퇴진시키면 된다. ‘정치’나 ‘내치’를 앞세워 날뛰는 사람에게 금융당국의 무서움을 깨닫게 해야 한다.

‘월가의 황제’로 불렸던 샌디 웨일 전 씨티그룹 회장은 증권사 사환으로 시작해 45년 만에 최고경영자(CEO) 겸 회장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3년 만에 CEO 자리를 내놔야 했다. CEO가 될 때 사외이사 지지를 얻기 위해 애널리스트를 시켜 사외이사 회사의 투자등급을 높이도록 한 것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 의해 들통났기 때문이다. 우리라고 못할 게 없다.

하영춘 금융부장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