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과학기술 公約은 필요없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말 미정부 과학기술 정책과정에 정치적 간섭을 금지하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이 가이드라인은 의사 결정에 활용되는 데이터와 실험 결과들이 과학자에 의해 철저하게 검증돼야 할 것, 모든 예산 집행 절차 등이 투명해야 할 것이 골자다. 오바마는 집권 초 이 구상을 시도하려 했지만 국회의원과 각 부처 관료들이 강력하게 반발해 수차례 연기했다. 멕시코만 기름 유출사건 해결 과정에서 과학적인 정보와 해결책이 제대로 마련되지 못하는 것을 본 오바마가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오바마는 얼치기 정치가와 정부 예산을 중개하는 거간들이 과학 결정에 참여하는 것을 극히 싫어한다. 기독교 윤리에 반한다고 해서 부시 정부 시절 강력하게 막았던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정부의 재정지원을 시작한 것도 오바마였다. "정부가 내린 과학적 결정은 정치나 이념의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하는 그다.

이명박 정부 들어 3년이 지났는데도 대선 때 내건 과학기술 공약을 놓고 아직 설왕설래하고 있다. 과학기술벨트를 만들어 세계의 연구자들을 불러 모으고 국내총생산(GDP)의 5% 이상을 연구개발에 투자하며 기초과학 연구에 중점을 둔다는 내용이 취임 초기에 밝힌 과학기술 공약들이었다. 그러나 이 공약들이 지금 와서 문제가 많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과학비즈니스벨트는 지방 자치 단체들 간 갈등으로 아직 입지가 선정되지 못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장소가 어디건 이 벨트에 들어가는 중이온가속기의 설치가 우선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모든 지방자치단체가 뛰어들면서 가속기와 연구 시설을 분산 배치하는 묘안까지 정치권에서 나왔다. 벨트 공약을 내걸지 말고 연구자들이 바라는 대로 중이온 가속기만을 일찌감치 들여왔더라면 벌써 이 가속기에 의한 성과물이 나왔을 것이다.

정부 연구개발(R&D) 투자비만 해도 과학기술계와 납세자인 국민들이 원하는 대로 쓰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명박 정부 취임 당시인 2008년에 10조8423억원이었던 국가 예산은 올해 무려 14조8000억원에 달하고 있다. 내년에는 16조원을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불과 4년 만에 60% 가까이 증가한 셈이다. 이렇게 R&D 예산이 급격하게 늘어난 나라는 찾아보기 매우 힘들다. 정작 국내 과학기술 수준이 얼마만큼 높아졌으며 국가를 이끌 성장 동력 성과물이 제대로 나왔는지 의문스럽다. 오히려 연구개발비 증가가 대학의 양적 성장만을 가져오고 질적 하락을 초래했다고 과학자들은 우려한다. 이 시기 박사학위 취득자만 3678명(2008년)에서 4138명(2010년)으로 무려 12.5% 증가했다.

물론 대선후보들의 과학기술 공약 남발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과학기술입국 과학기술강국 과학기술중심사회 등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과학기술 행정조직을 바꾸고 각종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과학자들이 바라는 사회안전망을 위한 과학기술의 역할이 강조되고 과학기술자들이 대접받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치인들과 대중주의자들은 천안함 폭파사건이나 광우병 사건, 원전 방사선 우려 등 주위에서 계속 발생하는 과학기술 이슈에 말의 성찬으로 국민들을 현혹한다.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면서 사안을 제대로 밝히려는 과학자들의 의지는 오히려 이들에 의해 짓눌린다. 대선이 다가오는 만큼 예비후보들의 과기 공약도 쏟아질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입김이 들어간 내용이나 시민들이 불안해하는 이슈들을 해결하지 못하는 공약들은 오히려 없느니만 못하다.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