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설날부터 보름간 이어지는 중국의 춘제(春節) 행사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상점 주인들은 하나둘 다시 문을 열고,고향에 갔던 사람들도 직장으로 복귀하는 중이다. 그러나 베이징에서는 200년 만의 가뭄으로 이제서야 내린 올 겨울 첫눈과 길에 내걸린 붉은 등들이 연출하는 묘한 조화는 축제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중국의 올 춘제 역시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보름날인 오는 17일 폭죽의 요란함과 함께 끝을 맺겠지만 한 가지 과거와 달라진 점이 눈에 띈다. 몇 년 전만 해도 중국의 춘제는 '달력에 없는 새해를 맞이하는 우스꽝스러운 짓'이라는 비웃음거리밖에 안됐지만 올해는 중국의 춘제를 축하하는 메시지가 세계 각국에서 울려 퍼졌다.

설날인 지난 3일 미국 뉴욕의 나스닥시장은 팽커위 주뉴욕 중국총영사를 초청해 개장을 알리는 벨을 누르게 하는 등 중국인들의 춘제를 축하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정부 홈페이지를 통해 중국의 춘제를 축하하는 영상메시지를 보냈다. 전임자인 케빈 러드와 같이 중국말로 한 것은 아니지만 줄리아 길러드 호주 총리 역시 중국인들의 춘제를 기념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 등 화교들의 영향력이 강한 나라에선 거리마다 홍등이 걸리고,백화점에선 춘제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는 소식이다.

서양인들이 어색함을 감추고 지난 3일이 '토끼 해'가 시작되는 날임을 인정하고 축하토록 한 것은 두 말할 것 없이 중국의 경제력이다. 170개 중국회사가 상장돼 있는 미국 나스닥시장에는 3년 전엔 70개 회사만이 이름을 올렸을 뿐이다. 캐머런 총리는 춘제 축하메시지를 보내면서 양국의 무역거래가 두 배로 늘어나길 바란다는 '구애성 희망'도 전달했다. 하긴 춘제 기간에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선 중국 관광단이 두 시간 동안 백화점을 통째로 전세 내 구매력을 자랑하는 일이 벌어질 정도이니 중국을 의식한 발언들이 쏟아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중국이 슈퍼 파워로 등장했고,전 세계에 돈을 뿌리며 친중국 세력을 확보하고 있는 현실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음력설을 쇠는 나라가 중국뿐 아니라 한국 베트남 싱가포르 등도 있는데 유독 '중국의 춘제'만이 주목받는 것은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만든다. 중국의 춘제에 한국의 설날이 가려버리는 것 같아 착잡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더구나 중국 내에선 춘제를 아예 중화년(中華年)으로 명칭을 바꾸자는 말도 나온다. 리한추 중국 전국정치협상회의 위원 겸 절경위원회(節慶委員會) 주임의 이 같은 주장은 음력설을 쇠는 한국 등 주변국을 무시한 발상이다. 물론 그의 말은 중국 네티즌들로부터 민속 명절의 이름을 왜 바꾸려 하느냐는 비판을 받는 등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유독 '중국의 춘제'만을 축하하는 서방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민망함과 중화란 이름 밑으로 주변국을 넣으려는 오만한 태도에 대한 불쾌함이 교차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하긴 민족이 분단된 당사국임에도 그 운명을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들이 쥐고 흔드는 현실을 보면 설날이 춘제에 무시당했다고 새삼스레 화를 낼 일도 아닌 것 같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분노나 짜증이 아니라 우리를 힘들 게 하는 것들을 이겨내겠다는 의지와 지혜가 아닌가 싶다. 신묘년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모두가 들메끈을 다시 한번 묶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설날이 춘제에 무시당하는 꼴을 더 이상 안 보지 않겠는가.

베이징=조주현 for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