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떼어냈는지 모르겠다.

정부와 한나라당이 '촛불 민심'에 밀려 공기업 개혁을 당분간 미루기로 했다는 발표가 나왔으니 말이다.

경기도 분당 토지공사 로비에 붙어있던 현수막 얘기다.

"물귀신 주택공사 스스로 갈 길 가라."

이명박 정부가 공기업 개혁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태세를 갖추자 토공 노동조합이 서둘러 내건 현수막의 표어다.

주공과 토공,두 공공기관의 악연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공공개혁의 단골 메뉴다.

사세가 상대적으로 약한 토공이 주공을 '물귀신'으로까지 표현했을 정도로 지긋지긋한 주제다.

그만큼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과제이기도 하다.

그런 골칫거리가 '일단정지' 신호를 받았다.

여당의 밀어붙이기에 청와대 일부 멤버들도 집권 초기 공공기관을 개혁하지 못하면 결국 좌초하는 결과를 빚을 수밖에 없다며 답답해한다니,토공 입장에선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긴 기술보증기금도 마찬가지다.

YS가 신용보증기금에서 떼어내 부산에 안겨준 선물이다.

어차피 토공과 같은 속앓이를 할 수밖에 없는 이 기관도 시민단체와의 연합시위 덕분에 신보와의 통폐합 '위기'에서 벗어나는 분위기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게 촛불 덕분이다.

촛불 집회가 미국산 쇠고기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듯,매일 밤 촛불을 들고 거리를 누빈 공기업 노조가 어찌 국민의 건강만을 염려했다고 할 수 있겠나.

통폐합 대상만이 아니다.

민영화 대상 공기업도 때마침 불거진 '촛불 정국'이 더없이 고맙기만 하다.

'하루 수돗물 값이 14만원…'으로 시작하는 소위 '민영화 괴담'은 굳이 출처를 따져 볼 필요도 없다.

괴담이 검증 기능이라곤 기대할 수 없는 토론장 '아고라'를 파고들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늘 강한 생존능력을 과시해온 공기업은 결국 '쇠고기 집회'의 촛불 뒤에 숨어들어 자신들의 '철밥통'을 훌륭히 지켜내고 말았다.

공기업들도 MB정부에 할 말이 있다고 한다.

끊임 없는 내부 개혁으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민간의 효율을 따라잡으려 밤잠을 설치는데 왜 민영화나 통폐합만을 고집하느냐고.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영국의 사례를 빗대어 보자.마거릿 대처 총리가 1979년 보수당으로서도 과격하다 싶을 정도의 대대적인 공기업 민영화 조치를 언급했다.

화들짝 놀란 내각이 일단 '기업화촉진운동(corporatization)'을 출범시켰다.

공기업이 민간기업의 흉내라도 내보도록 하자는 조치였다.

그러자 대처 총리와 그녀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키스 조지프는 그들의 조치에 이런 평을 했다.

"당나귀 등에 페인트 칠을 한다고 해서 얼룩말이 되겠는가."

당나귀들의 뻔한 술수에 말려든 정부와 여당도 답답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외면한 채 촛불 뒤로 숨어든 당나귀들이야말로 정말 한심할 따름이다.

김정호 경제부장 jh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