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사회가 공황 상태인 모양이다.

대통령의 관료들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하고 있어서다.

타깃으로 여겨지는 옛 재정경제부 출신 관료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이루 표현하기 어렵다.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관료사회를 비난하면서 '모피아(제 식구 챙기기에 급급한 옛 재경부 관리들을 비꼬는 표현)'라는 용어까지 동원했으니 말이다.

모피아 출신들은 이미 곳곳에서 배제되고 있다.

대신 민간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대통령이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들과 가진 간담회에 재경부 출신 금융기관장은 한 사람도 초대받지 못했다.

미국 방문에 수행할 금융 CEO 7명도 민간 출신 일색이다.

인사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금융위원장과 부위원장 자리를 모두 민간에 내주더니 금융통화위원 교체 과정에서 관료들은 하마평에조차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공기업 인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관료 출신은 원천 배제라는 소문이 원칙처럼 굳어지고 있다.

물론 섭섭함을 표하는 관료들이 적지 않다.

정권 교체기마다 공무원을 개혁 대상으로 올려놓고 마른 북어 두들기듯 한다는 불만에서,테크노크라트들을 마치 좌파정권의 부역자 취급한다는 볼멘소리에 이르기까지 표현도 다양하다.

잘 훈련된 공무원들이 배제되는 현실을 '국력 낭비'라고까지 말하는 OB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푸념을 듣고 있노라면 관료들이 여전히 문제의 핵심을 의도적으로 비켜가려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관료들은 정권이 수 없이 바뀌었지만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적이 없다.

정책에 대한 소신은 논외다.

스스로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고 말할 정도니 말이다.

다만 공무원들은 정치권에 온갖 협력을 다하면서 자신들이 챙겨야 할 자리만큼은 철저하게 챙겼다.

그 대표적인 결과가 지금의 공기업 인사 구조다.

공기업 사장과 감사 자리의 3분의 1을 대통령이,3분의 1을 정치권이 챙겼다면 관료들도 떳떳하게 나머지 3분 1을 차지했다.

경영평가와 감사를 백날 해봐야 결코 바뀌지 않는 '공기업 체질'이 형성된 배경이다.

일각에서는 이 참에 공기업 CEO와 감사 자리를 모두 민간으로 바꿔보자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민간이 꼭 정답은 아닐 수도 있지만 충격요법 차원에서라도 한 번은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언론이 총선에 정신이 팔려 주목하지 못했던 외신 하나를 소개해 보자.미국이 장관과 공공기관장에 민간의 피를 수혈한 데 이어 비영리 공익기관들마저 민간 CEO들을 영입하기 시작했다는 뉴욕타임스의 9일자 보도다.

미국 적십자사는 AT&T 임원과 피델리티 소비자금융부문 사장을 지내면서 '미국 재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불리는 게일 맥거번을 총재로 영입했다.

재정 적자와 혈액유통의 난맥상 등 산적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게 적십자사의 설명이다.

전임 총재는 국세청장 출신이었다.

복지단체 포드재단은 맥킨지의 루이스 유비냐스를 이사장으로 영입했고,봉사단체 해비타트는 골드만삭스 디즈니 등을 거친 조너던 렉포드에게 지휘봉을 넘겼다.

기금 운용,기부금 확보,효율적인 경영에 민간의 도움이 절실했다는 얘기다.

조직의 근본적인 혁신은 인사에서 비롯돼야 한다는 명제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다를 것이 없다.

김정호 경제부장 jh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