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유일하게 풍성한 것은 사방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대형 구호들이다. 김정일 부자에 대한 찬양이나,'미제(美帝)의 각을 뜨자'등 섬뜩한 구호가 대부분이다. 그 많은 구호들 중 나의 눈을 끈 것은 '우리식대로 살자'는 것이다. 아마도 '못살더라도 우리식대로 살자'가 줄여진 구호일 것이다. 이 구호는 북한주민 전체의 진정한 의사와는 무관한,김정일과 그와 이해를 같이 하는 소수 집권자들의 결의의 표현일 것이다. 그들은 '자기식'을 고수하는 경우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경제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가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사활이 걸려있는 체제유지가 우선이니 대안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잘사는 경제를 만들어야 된다는 결의가 어떤 나라보다 강한 남쪽은 어떤가? 혹시 우리도 '우리식'대로 국가와 경제를 운영하면서,현안문제를 풀어 갈 수 있고,잘사는 경제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기야 세계경제의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할 시장경제를 기회있을 때마다 외치고,'세계 속의 한국'운운하는 우리 정부를 언뜻 보면 '우리식'이 아닌 '세계식'을 기본으로 국가와 경제를 운영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최근에는 대통령이 '재벌 개혁'이란 용어가 갖는 국제경제사회의 이질감을 염두에 둔 듯,'시장 개혁'이란 생소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에 앞서 '세계식'이 되려면 시장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더 중요하며,과연 시장이 '개혁의 대상'인지 '귀환(歸還)의 대상'인지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잘못 선택된 쟁점을 중심으로 온 나라가 지극히 비생산적인 논쟁을 거듭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표적인 것이 '보수와 진보'의 구분이다. 국가 사회가 지켜야 할 기본적인 가치를 분명히 하고,이를 어떻게 유지 발전시켜야 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의 차이를 기준으로 보수와 진보가 갈려야 마땅하다. 우리나라가 소위 헌법적 결단을 거쳐 합의에 이른 국가사회가 고수해야 할 기본적인 가치는 말 할 것도 없이 민주주의 법치주의 자유시장경제의 원리다. 그런 의미에서 보수와 진보의 차이는 이 원리들을 어떤 속도로,어떤 방법론을 가지고 구현하고 발전시킬 것이냐가 가름의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이 기본적인 가치와 이념을 부정하는 사람들이,한편으로는 지구상에서 이 원리와 가장 거리가 먼 원칙과 이념에 입각해 국가운영을 하면서 수십년간 한번도 달라져 본 적이 없는,가장 수구(守舊)적인 북한정권과 이해(利害)와 이념을 같이 하면서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로 자처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니,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이미 논의의 기반을 상실했다고 할 것이다. 성장 우선론이냐,분배 우선론이냐는 경제운용 방향에 대한 이분법적 논쟁도 그러하다. 경제를 아는 그 누구도 스스로를 위의 어느 한 범주에 속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하기야 얼마 전,DJ정부와 현정부의 경제정책 수립에 지대한 정신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되는 원로 경제학자가 인터뷰에서 '분배로 돌아 갈 때가 됐다. 분배를 10년 하다가 후유증이 생기면 다시 성장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이야기한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기자가 잘못 옮긴 것이 아니고 그 분의 진의라면 놀랄 일이다. 경제정책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성장과 분배,그리고 양자의 조화 문제에 대한 진정으로 의미 있는 쟁점은 이 과제를 주로 시장적 접근에 의지하면서 풀어 갈 것인가,아니면 주로 정부가 인위적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정책 수단을 동원해 해결할 것인가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사회에서 가장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논쟁의 초점은 '우리식'이냐 '세계식'이냐의 구분이라고 본다. 그래야 실질적 토론과 대안의 선택이 가능해 진다. 경제분야에 국한해서 본다면 시장경제의 원리와 글로벌 스탠더드에 따라 경제를 운용하겠다는 것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 이후 우리경제에 성공을 가져왔지만,변화된 세계 경제여건 하에서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우리식'경제운용방식을 버리고 '세계식'대로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런데 지금 이 정부가 과연 이런 문제의식과 실천 의지를 가지고 시장경제를 하겠다고 말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inkim@shink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