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이 손안에 있소이다?..金秉柱 <서강대 경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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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오공이 자기 재간을 마음껏 뽐내려 한참 멀리 날아가다 우뚝 솟은 다섯 봉우리 암벽에 다다라 "여기 왔다 가노라"는 글귀를 새기고 돌아와 자랑했다.
그게 바로 정좌한 부처의 손바닥 안이었다는 사실에 머쓱했다는 서유기의 한 대목은 세속인의 잔재주와 오만을 경계하는 우화로 일품이다.
내가 남을 내 손안에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나는 또 다른 사람의 손안 노리개이기 십상이다.
아니 그 연속고리가 도대체 어디 누구에게서 끝나는지 모른다.
어느 TV 역사극 중 권모술수에 능한 지략가의 말투로 한 때 시중에 크게 회자되었던 말이 '이 손안에 있소이다'였다.
영화와 오욕으로 얼룩진 그의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대선을 앞둔 오늘날 정국에 바로 유사한 인물들이 세인의 이목을 끌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정치·경제·안보·사회 문화 등 국정운영 전반에 걸친 청사진을 내걸고 유권자의 지지폭을 넓혀 나가는 것이 선거운동의 원칙일 것이다.
현실은 이같은 원칙과 동떨어져 있다.
정책 대결은 뒷전이고,여·야가 상대방 후보의 결점 부각에 총력을 집중하고 있다.
서로 상대방의 약점을 확대·심화시키는 선거운동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없는 것은 개연성있는 것으로,개연성있는 의혹은 확실한 것으로 만들어 취약점을 파고 든다.
새 것이 있으면 좋고,없으면 낡은 것을 재탕한다.
미증유의 폭우로 피해가 큰 민생을 감안해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가 있지만,앞으로 대선까지의 1백여일은 집권세력이 북어 두드려 패듯이 야당 후보 아들 병역비리 고발은 계속되고,국회에서 두 차례 총리 임명동의안 부결에 성공한 야당의 대여 공세도 지속될 것이다.
야당 후보는 김대업 손안에,집권세력의 레임덕 가속화는 다수당의 손안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또 누구의 손안에 있는가.
잘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관련사건 귀추를 궁극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유권자인 국민이고,정치인은 그 뜻에 순응한다.
정치인은 결국 국민의 손안에서 고분고분한 일꾼이라는 뜻이다.
잘못되는 나라에서는 연속고리를 역으로 돌린다.
정치인들이 국민을 손안에 갖고 논다.
집권세력은 대중매체 조정과 여론 조작을 통해 국민의 눈과 귀를 편향되게 이끄는 경향이 있다.
국민이 정치인 손안의 노리개로 전락하는 꼴이 벌어진다.
독재자는 빵과 서커스만 있으면 국민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것으로 만만하게 보았고,영국 저술가 올더스 헉슬리(1894∼1963) 같은 이는 정부의 언론 장악을 민주사회의 최대 적으로 보았다.
그런데 동서고금 역사의 가르침은 최고의 정치 지도자(황제,대통령)에게는 항상 측근에 천적이 있다는 것이다 잔재주에 능한 간신배는 실력을 과시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중국 후한(後漢) 말기 황제의 옹립·폐위를 자유자재로 하던 십상시(十常侍)가 그 대표 사례이다.
언제 어느 정권에도 다른 이름의 그들이 재현할 위험은 존재한다.
그들은 주군의 눈과 귀를 가리고,아집을 정책 일관성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그것을 사전에 간파 제거하는 것이 최고 집권자의 몫이다.
그 성공여부가 집권 치적 평가를 좌우하는 핵심요인이다.
연속고리를 거꾸로 돌리려는 정치인의 노력은 단기간 어느 정도 성공한다.
그러나 '모든 국민을 일시적으로 속이거나 일부 국민을 항상 속일 수는 있지만 모든 국민을 항상 우롱할 수는 없다'는 링컨(1809∼1865)의 말은 옳다.
왜냐하면 때가 되면 국민의 여론과 힘이 홍수를 이루어 문제 정치인의 조각배를 함몰시키기 때문이다.
세계화,글로벌 스탠더드를 입버릇하며 국제 감각을 과시하는 우리네 정치 지도자들이 실제 행동양식은 고립국가의 시골마을 촌부들을 닮아있다.
한국 상품이 어느 나라 시장에서 잘 팔리고 있는가를 자랑하기 이전에,어느 나라가 한국 시장을 자기네 손안에 있고,곧 그렇게 될 것으로 여기고 있는가 하는 생각에 등에 식은 땀 흘리는 지도자를 기대한다.
홍수가 끝나고 나자 개구리소리,매미소리가 요란하다.
우물안 개구리소리,고목나무에 패거리끼리 짝짓기 바라는 매미소리를 멀리하고 싶은 계절이다.
pjkim@ccs.sog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