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31) 대륙과 해양문화의 접점, 탐라
일본 오키나와 남쪽 미야코섬에 있는 고인돌. 제주도와 양식이 비슷하다.

일본 오키나와 남쪽 미야코섬에 있는 고인돌. 제주도와 양식이 비슷하다.

해양 소국 탐라(耽羅)는 고대 국가들의 흥망성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탐라는 고구려와도 연관을 맺었다. 《위서(魏書)》에는 문자왕 때 북위에 파견된 사신이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珂·진주라는 설)는 섭라(제주도)에서 생산됐는데, ‘가’는 백제가 점령해 못 보낸다”고 변명하는 내용이 있다. 또 제주의 삼성신화(三姓神話)를 수록한 《영주지(瀛洲志)》에는 시원신화를 소개하면서 삼성혈에서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솟았다고 했는데, 비슷한 이야기가 실린 성주고씨가전(星主高氏家傳)에는 고씨가 고구려에서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제주도와 고구려는 경제적인 교류는 물론 주민들 이동도 가능했을 것이다.
신라에 항복…801년 이후 국가 관련 기록 없어
탐라는 신라와는 비교적 늦게 관계를 맺었다. 《영주지》에는 고을나의 15대 손인 고(高)씨 3형제가 신라에 입조해 왕에게 작위를 받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는 662년에 탐라국주가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에도 신라와 교섭을 벌였지만, 801년을 끝으로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장보고를 비롯해 당나라에 거주했던 ‘재당 신라인’들은 일본을 오고갈 때 제주도를 경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오키나와와 교류해 주목
탐라, 유구국 등 아시아 남방지역과 활발한 교류…당나라 거주 신라인들의 경유지 역할 했을 수도

탐라는 일본 열도와도 교섭이 활발했다. 《영주지》에 따르면 3성혈에서 나온 ‘고·양·부’ 3인과 결혼한 삼신녀는 일본으로 알려진 동해 벽랑국에서 왔다. 661년 5월에는 왕자인 아파기 등이 왜국에 공물을 바쳤고, 665년부터 693년까지 빈번하게 사신단을 파견했다. 또 저장성 해안을 출항한 4차 일본 견당선이 표류 끝에 일부가 탐라도에 표착했을 때 적국임에도 불구하고 잘 돌려보냈다. 하지만 778년 12차 견당선의 일부가 표류했을 때는 억류시켰다. 이를 보면 탐라는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갖고 자국의 위상을 확보한 듯하다. 수나라 역사서인 《수서(隋書)》에 따르면 일본을 오고가는 사신들이 남쪽으로 제주도를 보면서 항해했다. 당나라 시대에도 일본의 사신단과 상인, 승려들은 제주도를 항로에 이용했다.

제주도의 역사와 문화가 독특할 뿐 아니라 더욱 가치가 있었던 것은 오키나와(琉球國) 지역과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이다. 1991년 남쪽의 미야코섬(宮古島)을 조사할 때 제주도 용담동 것과 동일한 고인돌을 발견했다. 그 후 이 섬에 홍길동이 도착해 조선촌을 건설했다는 흥미로운 주장들이 나왔다(설성경 설). 고려 때인 1019년에는 탐라사람 21명이 폭풍을 맞아 털 난 사람들이 옷 벗고 사는 동남쪽섬(오키나와)에 표착했고, 1096년 표류했던 탐라사람들은 20명이 죽고 3명만 탈출했다. 조선시대 영조 땐 장한철이 오키나와 남쪽의 호산도까지 표류했고, 순조 땐 홍어 장수인 문순득이 흑산도 해역에서 오키나와까지 표착한 다음에 여송(루손), 마카오, 명나라를 경유해 조선에 귀환했다.
변방에서 진주로 빛날 가능성
반면 오키나와 지역에서 제주도로 오는 경우도 많았다. 《고려사》에는 귤 같은 남방 식물이 재배됐다고 기록됐고, 《탐라지》 등에 소개된 차귀당신 같은 뱀 숭배는 남방계 신앙이다. 유구국은 고려시대부터 사신단들을 파견했는데, 조선시대에는 태조 때부터 들어왔다. 세종 때(1429년)에는 포모가라 등 15명의 유구인들이 울진현에 표착했다. 또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유구국 왕을 구하러 가던 왕세자가 폭풍우로 제주도에 표착했을 때 제주목사가 이들을 죽이고 보물을 빼앗은 일마저 있었다. 이렇게 제주도와 오키나와는 공식·비공식적으로 아주 오랫동안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유구국은 조선에 35차례의 사신단을 파견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2회의 사신을 파견하는 데 그쳤다.

탐라는 해양 소국이었지만 동아지중해 해륙교통망의 교차로였으며, 물류망의 거점(hub)이었다. 또한 대륙문화와 해양 남방문화가 만나고, 범동아시아의 대부분 종족이 모여 발전한 문화의 심장(heart)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억눌렸던 변방의 섬이었고, 피해 의식과 쌓인 한도 적지 않았다. 이제 해양의 시대를 다시 맞이한 제주도가 탐라국의 개방성과 능동성을 회복한다면 동아시아 세계의 진주로 빛날 수 있다.
√ 기억해주세요
동국대 명예교수
사마르칸트대 교수

동국대 명예교수 사마르칸트대 교수

제주도의 역사와 문화가 독특할 뿐 아니라 더욱 가치가 있었던 것은 오키나와(琉球國) 지역과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이다. 탐라는 해양 소국이었지만 동아지중해 해륙교통망의 교차로였으며, 물류망의 거점(hub)이었다. 또한 대륙문화와 해양 남방문화가 만나고, 범동아시아의 대부분 종족이 모여 발전한 문화의 심장(heart)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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