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통상자원부가 다음달 국회에 제출 예정인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절차에 관한 법안’에 사용후 핵연료(고준위 방폐물) 처분장 부지를 정부가 직권으로 정할 수 있다는 문구를 집어넣었다. 방폐장 유치에 응모하는 지방자치단체가 없을 경우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정부가 일방적으로 부지를 선정했다가 주민 반대로 아홉 차례나 건설이 무산된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야당은 벌써부터 “법안 통과를 저지하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주민 반대 피하려 공모한다더니…방폐장 부지 '직권 결정 조항' 끼워넣은 정부
산업부는 지난 5월 ‘사용후 핵연료 처분 로드맵’을 발표하며 2028년까지 공모 형식으로 고준위 방폐장 부지를 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지자체장이 공모 신청을 하더라도 주민투표 등 지역 주민 의사를 확인하는 과정을 추가적으로 거치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지난 20일 입법예고를 마친 고준위 방폐물 관리절차법 13조4항에는 ‘산업부 장관은 공모에 응모하는 시·군·자치구가 없는 경우 후보지의 전부나 일부를 기본조사 대상 지역으로 선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25일 확인됐다. 경북 경주 지진으로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상황에서 고준위 방폐장을 유치하겠다는 지자체가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그럴 경우 이 문구에 따라 정부가 직권으로 후보지를 정할 수 있다.

정부는 1980년대 중반부터 고준위 방폐장을 지으려 했지만 일방적으로 부지를 선정했다가 주민 반대 등에 부딪혀 번번이 무산됐다. 1990년 이른바 ‘안면도 사태’가 대표적이다. 정부는 충남 안면도에 ‘서해과학연구단지’라는 원자력연구소를 짓는다고 하고 실제로는 고준위 방폐장 건설을 추진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민들이 경찰서에 불을 지르는 등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이 일로 당시 정근모 과학기술처 장관이 사퇴했다.

정부가 다음달 국회에 제출할 고준위 방폐물 관리절차법도 이 같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게 야당 판단이다. 원전과 가까운 지역의 야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소속 박재호 더불어민주당 의원(부산 남을)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주민들과 최적의 방안을 찾아야지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건 절대 안 된다”며 “이런 식이면 반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같은 당 전재수 의원(부산 북·강서갑)은 “정부가 직권 결정할 수 있게 한 건 말이 안 된다”며 “여소야대 상황에서 법안이 국회에 넘어오면 통과될 리 없다”고 했다.

국민의당 관계자는 “로드맵 발표 때 산업부가 ‘응모 지역이 없을 시 직권으로 할 수 있는 길도 열어놓겠다’고 설명했지만 그 내용을 법안에 명시할지는 몰랐다”며 “경주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원전 안전성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정부가 과거처럼 밀어붙이기 식으로 부지를 정하겠다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새누리당은 정부 의견을 옹호하고 있다. 산업위 새누리당 간사인 이채익 의원(울산 남갑)은 “유치 지역이 많을지 없을지 모르는 가운데 여러 상황을 가정해 대안을 만드는 게 맞다”며 “정부가 직권 결정할 수 있다는 내용을 법안에 넣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산업부는 “정부가 지역을 선정하더라도 주민 동의를 구할 것” 이라고 해명했다.

이태훈/은정진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