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국회 권력 제한 개헌론
한국 경제가 저(低)성장 늪에서 허덕이고 있다. 일자리는 없고, 소득은 줄어 삶의 불안이 엄습하고 있다. 길고 어두운 침체 터널에서 탈출할 일이 막막하다고 아우성이다. 이런 시기에 정치권에서는 한가한 듯 개헌 논의가 무성하다.

제왕적 대통령제, 막강한 권좌를 차지하려는 과열경쟁의 폐해를 막아야 한다는 게 개헌론의 명분이다. 대통령제는 ‘87년 체제’가 낳은 헌법의 결함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래서 정치권이 검토하는 게 이원집정제 또는 의원내각제다. 그런 권력구조야말로 번영의 길이라는 말로 국민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권력구조와 번영 사이에는 긴밀한 인과관계가 없다. 같은 내각제라고 해도 독일은 실업률에서 영국보다 훨씬 높았던 때도 있고 낮았던 적도 있었다. 소득증가율에서는 대통령중심제인 미국이 내각제인 독일보다 두 배 이상 높았던 적이 많고, 실업률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원집정제인 프랑스 성장률은 지난 5년간 1% 내외로 초라한 실적이다.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말도 귀에 거슬린다. 견제받지 않는다는 뜻인데, 헌법적으로 대통령은 삼권분립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정치적 수사일 뿐이다. 대통령은 의회 승인 없이는 어떤 정책도 펼치기 어렵게 돼 있다. 그래서 주목할 건 국회다. 국회는 두 가지 헌법적 과제가 있다. 하나는 예산심의·의결, 국정감사권 등 행정부를 견제하는 ‘실용적’ 과제다. 다른 하나는 법을 만드는, 그래서 ‘원칙’과 결부된 과제다. 두 과제는 성격상 다른 권력임에도 국회에 집중돼 있는 게 한국 헌법의 첫 번째 치명적 결함이다. 국회는 원칙에서 벗어나 기회주의적으로 입법을 이용할 위험성이 있다. 그래서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 유서 깊은 삼권분립은 처절하게 실패했다는 하이에크의 지적이 한국 헌법에도 타당하다.

한국 헌법의 오류는 또 있다. 헌법이 잘못된 두 가지 법사상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의회의 다수가 결정하면 그게 무엇이든 법이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회는 자율적이어야 한다는 인식이다. 이런 인식 때문에 헌법은 입법권의 오남용을 막기 위해 의회권력을 제한할 헌법장치를 마련하지 않았다. 기업의 손발을 묶는, 법 같지도 않은 법이 과잉 생산되고 있는 것도 그래서다.

입법권을 제한하기는 고사하고 입법만능주의를 권장하는 점이 한국 헌법의 마지막 세 번째 결함이다. 헌법은 시장경제의 자생적 힘을 불신한 나머지 경제활동 규제, 특정 지역·산업 보호육성, 포괄적 복지 등을 위한 반(反)시장 입법을 거의 무제한 국회에 허용하고 있다. 그래서 김정호 연세대 교수는 “한국 헌법은 사회주의에 더 가깝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헌정 질서의 결함은 대통령제가 아니라 헌법이 허용한 국회의 무한권력이다. 입법독재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그것도 모자라 국회권력을 더욱 확대·강화하겠다는 게 권력구조 개헌론이 아닌가.

20대 개원 뒤 두 달 동안 법안을 1000건이나 쏟아낼 정도로 제왕적이고 오만한 게 국회의 현주소다. 합리적인 입법자라면 눈뜨고 볼 수 없는 ‘쓰레기’ 법안이 대부분이다. 첩첩이 쌓인 그런 규제법으로 한국 경제가 심각한 동맥경화증을 앓고 있는 것도 입법권을 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강화하는 헌법 탓, 즉 ‘헌법실패’라는 걸 직시해야 한다. 행정부의 ‘권력구조’보다 국회의 ‘권력제한’을 중요시할 이유도 파멸적인 헌법실패 때문이다. 근대 헌법의 시조인 17세기 권리장전, 권리청원도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것을 헌법의 제1 과제로 여겼다.

입법권을 효과적으로 제한하는 헌법장치가 없는 나라는 헌법이 없는 나라나 다름없다. 따라서 기왕에 개헌할 거라면 비전도 철학도 없는 권력구조 개헌이 아니라 국회의 ‘권력제한’ 개헌을 해야 한다. 이는 반시장적 헌법조항을 없애고 자유·재산을 침해하는 입법을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내용의 헌법 만들기다. 자유사회의 헌법 아래에서만이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며 풍요 속에서 자유롭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

민경국 < 강원대 명예교수·경제학 kwumin@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