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인생 쓴맛은 결국 藥이 되더라
첫 번째 쓴맛은 명문中 입시 낙방
재수 대신 신설학교行 공부 재미붙여
대우전자 시절 佛가전업체 인수 실패로
두번째 쓴맛봤지만 M&A노하우 배워

정부사업도 속도전으로 승부해야
대전본청-서울사무소 수시로 영상회의
신속한 의사결정 시스템 구축에 주력
돈만 대주기보다 실행방안까지 챙길 것


1996년 10월 프랑스 파리의 한 호텔. 대우전자 임원들이 샴페인을 터뜨렸다. 프랑스 가전기업 톰슨멀티미디어 인수에 성공한 것을 자축하는 자리였다. 대우전자는 6조원에 가까운 빚을 떠안는 조건으로 톰슨멀티미디어를 1달러에 인수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거래는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 “1달러에 보석 같은 국민기업을 팔 수 없다”며 프랑스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져서다. (부채를 감안하면) 사실상 6조원에 인수하는 것이었지만 반대 여론이 컸다. 두 달 뒤 프랑스 정부의 ‘불허’ 방침이 발표됐다. 인수합병(M&A) 작업을 주도한 대우전자 전략담당 임원은 그 순간 고개를 떨궜다. ‘두 회사 합병으로 세계 최고 가전기업을 만들겠다’는 꿈도 날아갔다. 주영섭 중소기업청장(60) 얘기다. 주 청장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세 번의 시련이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모두 큰 자산이 됐다”며 “시련 속에서 단련하고 배운 인생이었다”고 말했다.

중학교 입시 인생 첫 쓴맛

기업인 출신으론 첫 중기청장이 된 그를 서울 통인동에 있는 삼다도에서 만났다. 주 청장이 나온 경복고가 지척이었다. 그는 “이 식당 앞 도로를 버스 타고 매일 통학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식당은 최근에야 왔는데 신선한 조개가 일품”이라고 소개했다. 코스요리로 주문했다.

기본 상차림으로 놓인 꼬막무침부터 맛봤다. 쫄깃한 식감이 살아 있었다.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게 이 집의 특기란 생각이 들었다.

“학창시절 얘기를 들려달라”는 말에 주 청장이 머뭇거렸다. 자신감 넘치고 거침없는 평소 모습과 사뭇 달랐다. 소주에 맥주를 섞은 ‘소폭’ 한 잔을 벌컥 들이켜고 입을 뗐다. 들어보니 이유가 있었다.

그가 인생의 ‘쓴맛’을 처음 맛본 것은 중학교 입시 때였다. 중학교도 시험 봐서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서울 남대문국민학교를 나온 그는 경기중을 1차로, 중앙중을 2차로 지망했다. 국어 산수 사회 등 기본과목의 시험 성적은 좋았다. 하지만 미술, 음악이 문제였다. 근소한 점수 차로 두 학교 모두 떨어졌다. 재수까지 고려했다. 하지만 “고교 입시 때 잘하면 된다”는 부친의 권유에 따라 진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그해 신설된 건국대부속중학교에 입학했다.

결론적으론 ‘전화위복’이 됐다. 신설 학교여서 선생님들이 열성으로 학생을 가르쳤다. 자율적 학습 문화도 잘 맞았다.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경복고에 진학해서도 공부에 탄력이 붙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성적은 전교 4등이었다.

“대우전자 1등 기업 만들려 했지만…”

요리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문어 숙회와 가리비 구이, 새우 야채 샐러드 등이 상에 올라왔다. ‘그린홍합 매운 볶음’이란 요리도 나왔다.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가져갈 때부터 매운맛이 확 올라왔다.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매콤했다. 소폭을 한 잔 더 권하더니 주 청장이 두 번째 ‘시련’을 얘기했다. 톰슨멀티미디어 인수 무산이었다.

그는 대학 시절 ‘세계 최고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되는 게 꿈이었다. 대학(서울대) 때 기계공학을, 대학원(KAIST) 때는 생산공학을 전공한 그는 늘 경영자의 꿈을 안고 살았다. 1980년 대우그룹을 첫 직장으로 택한 것도 대우가 표방한 ‘글로벌 경영’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대우자동차, 대우조선을 거쳐 대우전자에서 18년간 근무했다. 대우전자는 세계 최고는 아니었지만 늘 꿈이 컸다. 사가에도 ‘오대양 육대주가 우리 일터다’는 구절이 있었다고 한다.

세계 최고 기업이 될 기회는 있었다. 톰슨멀티미디어가 매물로 나왔을 때도 그중 하나다. 주 청장은 미국(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박사학위(산업공학)를 받은 직후 1995년 복귀했다. ‘탱크주의’로 유명한 배순훈 회장이 있을 때였다. 배 회장은 당시 전략담당 이사였던 주 청장에게 이 일을 맡겼다. 인수에 성공하면 대우전자가 단숨에 국내 1위로 올라설 기회였다.

주 청장은 KPMG, 보스턴컨설팅그룹(BCG) 등 M&A 최고 전문가들과 팀을 꾸렸다. 적자 상태에 놓인 톰슨멀티미디어를 어떻게 흑자로 돌려놓을지 해법을 제시하는 게 과제였다. 6개월간 파리에 머물며 이 작업에 매달렸다. 결국 실패하긴 했지만 그는 “개인적으론 성공”이라고 했다. 목표한 인수 대상자에까지 뽑혔다는 점에서다. “기업 M&A 노하우를 세계 최고 전문가에게서 배운 것도 큰 소득”이라고 덧붙였다.

대우전자 매각 작업 중 워크아웃

[한경과 맛있는 만남] 주영섭 중기청장 "대기업서 체득한 '디테일 경영', 중기 정책에 '깨알'같이 담아낼 것"
이 식당의 백미인 백합조개찜이 나왔다. 찜통 뚜껑을 열자 포일에 싸인 백합조개가 수북이 있었다. 주 청장이 포일을 벗겨내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백합조개 하나를 내밀었다. 조갯살을 쏙 빼먹고 안에 있는 국물을 들이켰다. 뱃속이 든든해져 저절로 ‘허’ 하는 소리가 났다.

세 번째 시련은 1998년이었다. 톰슨멀티미디어 인수 때와 상황이 완전 바뀌었다. 대우그룹은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었다. 대우전자를 ‘굿 컴퍼니’와 ‘배드 컴퍼니’로 나눠 매각하는 일을 그가 맡았다. M&A라면 자신 있었다. ‘굿 컴퍼니’를 세계 최대 사모펀드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에 매각하는 게 목표였다.

주 청장은 사흘 단위로 시간을 썼다. 첫날 아침 본사로 출근해 회의한 뒤 곧바로 미국으로 떠났다. 잠은 비행기에서 자고 현지에서 둘째날을 맞았다. KKR 관계자 등과 회의가 끝나면 저녁 비행기로 한국에 돌아와 셋째날을 맞았다. 도착해선 바로 회사로 달려가 상황을 보고했다. 이런 식으로 3개월을 보냈다.

하지만 주 청장은 지치지 않았다. 지칠 겨를이 없었다. 매각에 실패하면 대우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꼭 거래를 성사시켜 일터를 지켜달라”며 우는 직원도 있었다. 성과가 있었다. KKR 측에서 투자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집행 단계에서 뒤집어졌다. 채권단이 돌연 대우그룹의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매각 작업도 중단됐다.

하지만 이때도 주 청장은 배웠다. 뜨거운 동지애를 느끼며 구조조정의 아픔을 마음에 새겼다. 기업이 무엇을 하면 되고 안 되는지를 깨달았다. 이후 주 청장이 GE와 현대자동차그룹 CEO로 살아가는 데 밑거름이 됐다. 또 공무원으로서 기업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게 뭔지 배우는 계기가 됐다.

“정부 사업도 민간처럼 빠르게”

주 청장은 지난 1월 취임 후 6개월간 ‘조직 내 빠른 의사결정’에 방점을 찍었다. 의사결정 시스템을 바꾸는 데 주력했다. “정부 사업도 민간 사업처럼 빠르고 효율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게 목표였다.

대면보고부터 최소화했다. 본청이 있는 대전과 서울을 자주 오가는 바람에 생기는 업무 공백과 지연을 최대한 없애려고 했다. 중기청 본청과 서울사무소에 화상회의 시스템을 구축해 수시로 영상 회의를 열었다. 이동시간엔 ‘콘퍼런스콜’도 한다. 필요한 사람들을 전화로 연결해 의견을 교환한다. 주간 회의는 기존 월요일 오전에서 금요일 오후로 옮겼다. 금요일엔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판단에서다.

비빔국수가 나왔다. 비빔국수의 달콤 쌉쌀한 향이 입안의 텁텁함을 없애줬다. 중기 정책에 대해 물었다.

그는 “정책을 세부적으로 짜려고 노력 중”이라고 했다. 연구비 지원처럼 방향성만 제시하는 것은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구체적인 실행안까지 정부와 기업이 함께 짜야 한다고 주장했다.

용인 보정동 거리를 통째로 해외에 옮기는 방안이 대표적 예다. 기존 소상공인 지원안은 개별적 지원이었다. 빵집이 중국에 간다고 하면 전시회 참관 비용을 대주는 식이었다. 주 청장은 “상권 하나를 아예 옮기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경기 용인의 ‘보정동 카페 거리’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진출시키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진출 지역은 중기청과 인도네시아 정부가 함께 논의할 예정이다. 임대료가 저렴한 곳을 개발해 상권을 흥행시키는 게 목표다. K팝 공연 등 다양한 문화 행사도 열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세 시간이 훌쩍 지났다. 식당에서 담근 백년초차가 후식으로 나왔다. 주 청장은 내년부터 이뤄질 바이오 민간주도 창업지원사업(TIPS·팁스) 구상도 밝혔다. 그는 “바이오 팁스에는 대형병원 안에 들어가 수요가 있는 곳에서 연구개발(R&D)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겠다”고 말했다. 영국은 병원 안에 국가 바이오 R&D센터가 있어 수요가 있는 기술을 바로 사업화 한다는 것이다.

“350만 중소·중견기업 세계화 적극 지원할 것”

1996년 설립된 중소기업청은 중소기업뿐 아니라 매출 1000억원 이상 중견기업과 동네 빵집 등 소상공인, 창조경제의 핵심인 벤처와 창업까지 총괄하는 부처다. 지난 1월부터 중소기업청을 이끌고 있는 주영섭 청장은 “중소기업도 세계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며 ‘글로벌 진출’에 정책의 방점을 찍고 있다. 세계로 진출하는 350만 중소·중견기업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주 청장은 최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세계 중소기업인의 날’ 제정을 건의하기도 했다. 창업 생태계 조성도 강조하고 있다. 중기청은 민간 투자사가 1억원을 투자하면 정부가 최대 9억원까지 제공하는 ‘민간주도 창업지원사업(TIPS·팁스)’에 대한 지원을 늘릴 계획이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주영섭 중기청장 "대기업서 체득한 '디테일 경영', 중기 정책에 '깨알'같이 담아낼 것"
■ 주영섭 청장의 단골집 삼다도
전북 부안서 공수한 백합조개찜 일품…갈치조림도 인기


[한경과 맛있는 만남] 주영섭 중기청장 "대기업서 체득한 '디테일 경영', 중기 정책에 '깨알'같이 담아낼 것"
서울 종로구 통인동에 있는 조개요리 전문점이다.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로 나가 300m가량 걷다 보면 우리은행 효자동지점이 나온다. 바로 왼편에 삼다도 간판이 보인다. 2001년 창업해 한자리에서만 15년을 영업했다.

정부서울청사, 청와대 등과 가까워 공무원이 많이 찾는다. 기업인 중에선 박용만 전 두산그룹 회장과 그 형제들이 단골이다.

저녁 메뉴는 단출하다. 백합조개찜과 갈치조림이 나오는 정식(4만원)과 여기에 연포탕 꼬막무침 전복구이 등이 함께 나오는 코스요리(6만원) 두 종류뿐이다. 꼬막과 문어, 가리비 등은 노량진수산시장에서 받아온다. 백합조개는 전북 부안에서 직접 가져온다. 백 가지 무늬가 있다는 백합조개는 연중 인기다. 언제 가도 신선한 백합조개찜을 맛볼 수 있다. 계절에 따라 메뉴가 일부 바뀐다. 아무래도 조개가 많이 잡히는 늦겨울과 초봄에 재료가 좋다. (02)725-2409

■ 주영섭 중소기업청장

△1956년 서울 출생 △1974년 경복고 졸업 △1978년 서울대 기계공학과 졸업 △1980년 KAIST 석사 △1980년 대우그룹 입사 △1995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산업공학 박사 △2000년 GE써모메트릭스코리아·GE써모메트릭스 아·태 담당 사장 △2006년 현대오토넷 대표 △2010년 산업통상자원부 R&D 전략기획단 주력산업총괄 MD △2014년 서울대 산학협력추진위원장 △2015년 대통령 직속 국민경제 자문회의 위원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