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연구 성과는 20~30년 뒤에 나타난다. 그러려면 연구자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맞춤형 평가를 해야 하지만 한국은 13개 부처에 370개가 넘는 연구 관리 규정이 따로 있다.”(민경찬 연세대 교수)

“좋은 아이디어는 위(정부)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 분야 연구자들에게서 나온다. 미국에선 시간을 줘서 논문 같은 깊이 있는 연구제안서가 나오는데 한국에선 과학자들이 매년 연구비를 받기 위해 제안서를 마감하느라 매달리고 있다.”(여준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로봇미디어연구소장)
[스트롱코리아] 연구개발 투자 늘었지만…세계 최고 연구자 중 한국인은 0.6%
지난 20일 이화여대 국제교육관 LG컨벤션홀. 미래창조과학부 주최로 열린 ‘대한민국 기초연구발전 대토론회’에서는 한국의 기초연구 발전을 위해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연구자들의 지적이 쏟아졌다. 이날 행사는 미래부가 과학기술 50주년을 맞아 기초연구 현장에서 활동하는 교수와 연구자, 대학원생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지난 4월부터 지역을 돌며 연 토론회를 결산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행사에 참석한 과학자 200여명은 “국내 기초연구 토양을 바꾸기 위해 정부가 연구자에게 더 많은 자율성을 주고, 눈앞의 성과보다는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줘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의 기초연구 투자는 해마다 늘고 있다. 박근혜 정부 들어 연구개발(R&D) 예산의 40%를 기초연구에 투자하고 있다. 올해에만 5조2000억원을 투입한다. 기초연구 역량도 급성장해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에 오른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 수는 세계 12위, 세계 3대 학술지인 네이처, 사이언스, 셀에 발표한 논문 수에선 세계 18위에 올랐다.

하지만 성과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게 과학계의 지적이다. 논문의 질을 평가할 때 보는 5년간 논문 1편당 평균 피인용횟수는 4.55회로, 상위 50개국 가운데 32위에 그쳤다. 한마디로 논문 발표는 증가하지만 이를 참고하는 다른 나라 연구자가 많지 않다는 뜻이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자 상위 1%(3126명) 중 한국 국적은 19명(0.6%)에 불과하다.

노벨상 수상이나 세계가 주목할 만한 핵심 기술을 확보하려면 기초과학에 대한 장기적 투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정부가 지원하는 기초연구비 가운데 연구자들이 스스로 제안하는 자율형 연구에 대한 투자는 도리어 줄고 있다. 자율형 연구비 비중은 2011년 27.3%에서 2015년 21.7%로 낮아졌다. 연구비를 배정하는 공무원의 입김이 세지면서 과거보다 연구자들이 느끼는 안정감과 자율성이 떨어졌다는 평가다.

과학자들 사이에선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지난 1월13~22일 한국연구재단에서 이공분야 기초연구과제를 지원받는 연구자 254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연구수행 환경에 대해 만족한다는 답변은 28.2%로 10명 중 3명에 불과했다. 연구 발전을 위한 연구비 획득(43.8%), 지속적인 연구비 확보(42.9%), 장기적 연구 수행의 어려움(40.7%) 등 안정적 연구 환경과 관련된 것들이 연구 수행 중 가장 힘든 일로 꼽혔다.

손병호 KISTEP 정책기획본부장은 “10년 넘는 장기 기초연구 과제를 늘리고 연구자에 대한 권한도 확대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