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기자 칼럼] 'NATO' 새누리당
2004년 3월23일 전당대회에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표로 선출된 박근혜 의원은 수락연설에서 “힘들다고 휘어지지 않고 모든 것을 바쳐 당을 살려 내겠다”고 했다. 이어 “천막을 쳐서라도 당사를 옮기겠다”고 했으며 곧 실천에 옮겼다. 한나라당은 검찰의 2002년 대선자금 수사로 촉발된 ‘차떼기 정당’으로 몰려 휘청거렸다. 천막당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2004년 4·17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100석도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121석을 건졌다. ‘천막당사 정신’은 당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되새기는 교훈이 됐다.

배 가라앉는데 선장 선출 갈등

총선에서 참패를 당한 새누리당은 총체적 위기다. 위기 진단은 물론 돌파 방안도 보이지 않는다. 총선 패배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계파갈등 청산 의지도 없다. 난파 당해 가라앉고 있는 배를 구하기보다 선장(당 대표)을 어떤 방식으로, 언제 뽑을지를 놓고 계파 간 갑론을박하고 있다.

패배를 수습할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을 두고 혼란을 거듭하다 총선 한 달 넘게 지나서야 관리형 비대위와 혁신위원회가 출범했다. 네 탓 공방을 벌이며 계파 간 이전투구는 오히려 더 심해지고 있다. 비(非)박계를 중심으로 탈당 얘기가 나오면서 여권발(發) 정계개편 전망도 제기된다.

당이 사분오열돼 가고, 집단 무기력증에 빠졌는데 이를 하나로 묶을 강력한 리더십은 없다. 15일 당 혁신위원장에 내정된 김용태 의원이 “총선 뒤 한 달이 더 참담하다”고 말했을 정도다.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새누리당 당선자 총회에서 “(새누리당은) 사과와 용서를 구할 게 아니라 어디가 잘못됐는지 진단하고 고칠 수 있는 대안을 내놓는 것이 순리”라고 했다.

새누리당 모습은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과 대조적이다. 두 야당은 내년 대선을 향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더민주는 지난 12일 “회초리를 맞겠다”며 광주에 내려가 당선자 워크숍을 열어 호남 참패에 대한 반성문을 썼다. 두 야당은 법인세 인상, 기업 사내유보금 추가 과세 등 경제민주화 화두를 다시 꺼내들고 대선을 겨냥한 선명성 경쟁에 나섰다. 김종인 더민주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총선 직후 경제 구조조정으로 선수를 쳤다. 김 대표는 지난 12일 “경제 플랜을 제대로 짜 집권할 때 실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새누리당은 ‘경제 담론’마저 야당에 뺏긴 것이다.

새누리당에선 천막당사 정신을 살리자고 말만 앞세우고, 천막을 치는 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과감한 용기와 결기는 보이지 않는다. 노동개혁법과 서비스발전기본법을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만 하면서 야당을 설득하고 관철시킬 대안도 없다. 그래서 말만 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NATO(no action talking only) 정당’ 소리를 들었다.

“천 번 생각보다 한 번 실천 중요”

김 혁신위원장은 “새누리당의 최우선 과제는 특권 내려놓기와 계파 갈등 청산”이라며 “뼛속까지 바꿔 놓는 혁신을 할 것”이라고 했다. 과연 이번엔 ‘NATO 정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세 번째 도전 끝에 4·13 총선 때 전북 전주을에서 승리한 정운천 새누리당 당선자는 자신의 좌우명을 ‘천사불여일행(千思不如一行: 천 번 생각하는 것보다 한 번 행동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이라고 소개했다(본지 5월6일자 A27면 참조). 새누리당이 당장 받아들여야 할 구절이다.

홍영식 선임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