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이대희 쿠첸 사장은 작년 성탄절에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쿠첸의 전기레인지 상판 설계도면을 유리공예로 제작한 것이었다. 전기레인지 상판을 쿠첸에 공급하는 독일 쇼트사 임원들이 쿠첸 본사로 찾아와 직접 건네줬다. “약속을 지켜줘 고맙다”는 말도 했다.

쿠첸이 2013년 처음 전기레인지사업에 뛰어들 때만 해도 쇼트는 뻣뻣하게 굴었다. 세계 3대 강화유리업체인 쇼트는 쿠첸을 ‘의미 있는’ 고객사로 보지 않았다. 쿠첸 측이 “한국 전기레인지 시장을 선점해 상판 주문량을 매년 늘리겠다”고 해도 믿지 않았다.

노사분규 해결사로 투입

사업 첫해 27억원에 불과하던 전기레인지 매출이 2014년 140억원, 지난해 242억원으로 껑충 뛰자 사정이 달라졌다. 쇼트의 한국 1위 고객사가 될 정도로 비중이 커진 것이다. 쇼트로선 쿠첸에 대한 신뢰가 생긴 만큼 관계를 잘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이 사장은 “한국 전기레인지 시장이 이제 막 커지고 있다”며 “2년 내 매출 1000억원 달성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전기레인지 시장을 개척 중인 이 사장은 전형적인 ‘2세 경영자’다. 부친 이동건 부방그룹 회장의 뒤를 이어 쿠첸을 이끌고 있다. 하지만 시작은 간단치 않았다.

그가 쿠첸 대표이사에 오른 것은 10년 전인 2007년이었다. 당시 쿠첸(옛 부방테크론) 천안공장은 노사 갈등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근로자들은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회사는 “매출이 줄고 영업적자까지 발생해 당장 들어주긴 어렵다”고 맞섰다. 당시 쿠첸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대기업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 전기밥솥을 납품하다 자체 브랜드(리홈)를 단 밥솥을 내놨지만 시장에 안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시점에 노사분규까지 발생하자 회사는 휘청거렸다.

이 사장이 ‘구원투수’로 나섰다. 당시 부사장이던 그는 노조와의 협상에 전권을 부여받았다. 이 회장은 그를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시켜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37세의 젊은 2세 경영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싸늘했다. 노조는 ‘뭘 알고 왔느냐’는 반응이었다.

이 사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다 죽는다”며 설득에 나섰다. 150여명의 노조원 한 명 한 명을 만나 경영 현황을 솔직하게 설명했다. 회사 재무상태도 모두 공개했다. 경영계획과 비전을 세세히 밝혔다. “경영협의회를 구성해 상시로 직원들과 소통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사장의 설득은 통했다. 직원 일부가 “극한 대립은 피하자”며 노조에서 탈퇴했다. 경영협의회도 가동되기 시작했다. 이 사장과 젊은 직원들 간 소통이 잘 이뤄졌다. 그럴수록 노조의 힘은 점점 빠졌고 자발적으로 해산했다. 이 사장은 경영협의회를 통해 모인 직원들 의견을 상당 부분 수용했다.

“빠른 추격자 전략 여전히 유효하다”

[비즈&라이프] 이대희 쿠첸 사장, 전기밥솥 성공 발판…전기레인지 1등 노린다
현장 경험은 이 사장에게 소중한 자산이 됐다. ‘안정적으로 이익을 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경영 원칙을 갖게 했다. “기업가가 외형 키우기에 집착하다 적자를 내 직원을 내보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는 것은 가장 큰 죄악”이라고 그는 말했다.

쿠첸이 국내 전기밥솥 시장에서 점유율 약 30%로 2위 기업이지만 1위 쿠쿠전자(점유율 약 60~70%)를 ‘반드시 꺾어야 할 경쟁 상대’로 보지 않는 것도 이 사장의 경영철학이 녹아든 결과다. 그는 “가격을 후려치는 식으로 시장을 훼손하는 행동을 절대 하지 말라”고 직원들에게 지시했다.

쿠쿠전자와 시장을 양분한 상황에서 뺏고 뺏기는 경쟁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봐서다. 대신 기술력과 혁신으로 차별화를 꾀할 것을 주문했다. 쿠첸은 전기밥솥 색상에 잘 쓰지 않던 검정을 업계에서 처음 도입하는 등 디자인에 파격을 시도했다. ‘블랙앤드실버’는 전기밥솥 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색상으로 자리잡았다.

한편으론 쿠쿠전자를 적극 벤치마킹하며 시행착오를 줄였다. “1위 기업에서 배울 게 있으면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쿠쿠전자가 신제품을 내놓아 인기를 끌면 재빨리 비슷한 제품으로 대응하는 식이었다. 미국 패스트푸드 2위 업체 버거킹이 1위 맥도날드 매장 바로 옆에 매장을 내는 전략으로 시행착오를 줄인 것을 본뜬 것이다.

이 사장은 “‘빠른 추격자(패스트 팔로어)’ 전략이 지금은 안 통하는 시대라고 하지만 중국 샤오미 같은 업체들이 여전히 이 전략으로 성공하고 있다”며 “2등은 2등답게 행동하면서 실력을 쌓아 나가다가 기회가 오면 치고 나가는 게 여전히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신시장 전기레인지에선 선두 되겠다”

쿠첸 직원이 300여명인 것을 고려, 이 사장은 ‘300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페르시아에 맞선 스파르타 용사의 용맹을 그린 영화 ‘300’처럼 직원 모두가 탄탄한 실력을 갖추게 하겠다는 것이다.

경기가 꺾이고 매출이 줄더라도 이익을 낼 힘을 축적하기 위해서다. 생산 라인의 군살을 빼는 작업에 나섰다. 한때 500여명에 달하던 천안공장 직원은 현재 90명 수준에 불과하다. 협력사를 키워 천안공장에선 부품 조립만 할 수 있게 바꿔놨다.

대유위니아 등 다른 가전업체들이 전기밥솥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기술만 있다고 성공할 수 있는 시장이 아니란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어서다.

쿠쿠전자에 전기밥솥 1위 자리는 내줬지만 전기레인지 시장은 선두로 치고 올라간다는 계획도 세웠다. 신규 분양 아파트에 선택사항으로 전기레인지를 대량 공급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그 성과가 이제 막 나오기 시작했다. 2014년 분양한 아파트에 공급하기로 한 물량이 입주가 이뤄지면서 속속 매출로 연결되고 있다.

이 사장은 “전기레인지와 오븐, 레인지후드를 묶어 패키지 상품을 구성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겠다”고 말했다.

이대희 쿠첸 사장 프로필

△1971년 서울 출생 △1995년 미국 클라크대 경영학과 졸업 △1999년 육군 경리장교 전역 △2000년 LG전자 수출영업부 △2003년 부방그룹 기획실 △2007년 부방테크론 리빙사업부(현 쿠첸) 대표이사 △2014년 쿠첸 대표이사 사장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