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한은 발권력을 구조조정에 쓴다는 발상
외국의 사례를 섣불리 인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잘못 인용된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GM 구조조정을 위해 발권력을 동원했다는 일각의 주장이 그런 경우다. 벤 버냉키의 《행동하는 용기》를 다시 읽어본다. 그는 상원 다수당 대표 해리 리드,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 상원의원 크리스 도도를 비롯한 의원들이 Fed 대출을 요청했었다고 밝히고, 그러나 끝내 거부할 수밖에 없던 경과를 설명하고 있다(447쪽).

Fed는 산업분야가 아닌 금융 패닉에 맞서는 게 기본 임무라는 것이 제1의 이유였다. 문어발식으로 뻗어 가는 제조업의 구조조정을 감독하는 기관이 아니라는 점, 무엇보다 전문성이 없다는 점, 제조업 위기는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에 의회가 이를 논의할 시간이 없지 않다는 점도 고려사항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폴슨 장관과 부시 대통령은 GM, 클라이슬러와 이들의 금융계열사를 지원하기 위해 정부기금(TARP)을 사용하기로 합의했다”고 버냉키는 회고하고 있다.

Fed는 보험사인 AIG에 대해서는 피해자가 사실상 전 국민이고 금융산업에 패닉 징후가 있다는 이유로 직접 자금을 대출했다. 그것도 AIG 보유자산 전부를 담보로 잡았다. 그렇다면 출자는? 아쉽게도 Fed뿐만 아니라 어느 중앙은행도 영업기관에 자본금을 출자한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외국의 사례가 없다고 우리가 시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수출입은행이나 주택금융공사에는 지금도 한국은행이 13.1%와 35.2%를 출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정부의 강요가 만들어낸 잘못된 출자 사례다. 이 과정에서 일종의 법률적 기만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수출입은행의 설립(1976년)은 또 그렇다 해도 민주주의를 유달리 좋아한다는 노무현 정부조차 한은 출자를 위해 한은법이 아니라 주택금융공사법을 슬쩍 개정하는 편법을 동원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한은 출자를 강요했다. 출자 금지를 명시한 한은법은 그대로 둔 채 주택금융공사법을 내세워 마치 이 법이 한은 특별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출자를 강요했다. 한은은 싸워 보지도 않고 정부 명령을 수용하고 말았다. 이런 변칙을 되풀이하자는 것이 지금 정부가 내세우는 ‘산업은행법 개정→한은 출자’ 논리다. 실로 황당한 일이다.

출자를 받기 위해서는 산은법뿐만 아니라 한은법도 고쳐야 한다. 그러나 이런 출자는 중앙은행의 존재 근거를 파괴하는 무지의 폭력일 수밖에 없다. 무책임한, 그리고 주인 없는 돈을 정부 마음대로 가져다 쓰는 일이 되풀이돼서는 곤란하다. 정부가 쓰는 돈은 근본적으로 국민의 피와 땀이 들어간 영혼이 살아있는 돈이다. 국가의 채무부담 행위도 당연히 국회 동의를 얻어야 가능하다. 그 과정에서는 치열한 논란도 생긴다. 그러나 이런 토론이야말로 국가적 자원배분 순위를 결정하는 민주적 의사결정 프로세스다.

물론 구조조정 문제를 국회로 끌고 가는 순간 정치 투쟁판으로 변질될 것이 뻔하다. 정치 공세를 위한 청문회 개최 요구들도 난무하게 될 것이다. 해고 금지 등 말이 안 되는 대안을 요구하면서 구조조정을 지연시킬 것도 우려된다. 우리가 우려하는 그대로다. 그렇다고 둘러 갈 수는 없다. 국회가 구조조정 문제를 뒤죽박죽으로 끌고 가면 정부는 그 과정을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보여주면 된다. 정부 역할은 거기까지다. 국회 때문에 나랏일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 나라의 운명이다. 관료들이 방향타를 잡을 수는 없다.

한은은 구조조정에 대해 권한도 책임도 지식도 없다. 발권력에는 국민들의 피와 땀 즉, 영혼이 없다. 발권력을 동원키로 한다면 굳이 정부가 세금을 걷을 이유도 없다. 차라리 조세를 폐지하고 돈을 찍어 재정을 충당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실은 정부조차 구조조정 문제에 충분한 최종적 지식을 갖고 있기나 한 것인가 말이다. 구조조정이 시급하다는 여론이 돌기 시작한 것이 벌써 두 해도 더 전인데 이제 와서 한은 발권력을 빌리겠다는 정부 행태가 정말 짜증스럽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