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구마모토에 대지진이 발생했습니다. 구호물자를 싣고 떠나는 우리 비행기의 사진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사진을 보면서 1354년 전, 서기 662년에 벌어졌던 역사적 사건을 떠올립니다. 백제를 구원하러 서둘러 바다를 건너 온 4만 명의 일본 병사와 400척의 군선입니다. 나당연합군에 맞서 백제가 멸망한 것은 660년 7월입니다. 의자왕과 태자 효가 항복을 하고 당나라로 잡혀갔습니다. 당시 일본에 머물고 있던 왕자 부여풍은 백제 부흥군의 중심이 되어 일본 조정이 편성한 군대와 함께 백제의 옛 땅으로 돌아옵니다. 흑치상지, 복신, 도침 등이 가세한 백제 부흥운동의 본격적 개전입니다.
[세계문화사 '콕 찌르기'] 백제를 위해 군사 4만·군함 400척 보낸 일본, 나당 연합군에 전멸
전부를 쏟아부은 일본의 백제전쟁

이듬 해 8월, 백제 부흥군의 중심지 주류성(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을 나당 연합군이 포위합니다. 일본 군대가 서해안에 도착했고, 격렬한 해전이 펼쳐집니다. 일본수군은 궤멸적 타격을 입고 참패했습니다. 그들은 백제를 위해 싸우다 거의 전멸했습니다. 이 유명한 사건이 바로 일본 교과서에 실려있는 ‘백촌강(白村江)의 전투’입니다. 우리 교과서에는 이 사건이 기술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배우지 못했습니다.

일본 고대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記)> 뿐 아니라, 우리 측 기록인 <삼국사기(三國史記)>, 그리고 중국 측 사서에도 꼭 같은 기사가 있으니, 백촌강의 전투는 역사적 사실일 터입니다. 백촌강이 어디인지에 관해서는 군산포 설, 금강 설, 동진강 설, 부안 설 등이 맞서고 있지만, 전투 자체가 벌어졌던 사실에는 각국 역사학자 사이에 이견이 없습니다. 임진왜란(1592) 한산도 대첩 당시, 조선군 전함이 55척, 일본군 전함은 73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거의 1000 년 전에 400척을 파병했다면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 것일까요? 일본은 백제를 돕기 위해 국력이 허용하는 최대치의 병력을 보낸 겁니다. 어쩌면 국력을 넘어서는 무리수를 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총력을 기울여 백제를 도왔을까요? 잠깐 여기서 숨을 고르고, 왜 일본 수군이 대패했는지부터 살펴봅시다. 패인은 자명합니다. 서둘렀기 때문입니다. 백제는 망했고 부흥군의 상황도 긴박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일본 조정은 서둘러 배를 건조했습니다. 당시 일본 수군의 핵심 전법은 ‘당파(撞破)’였습니다. 상대적으로 우수한 항해술을 활용, 스피드를 내며 적국의 배를 들이 받습니다. 우지끈 소리가 나며 양측의 배가 다 부서지면, 부딪히며 생겨난 ‘이어진 지점’으로 전투병을 투입하고 육박전을 벌여 상대의 배를 장악합니다. 상대 배의 자재를 활용해 우리 배를 수리하는 한 편, 적국보다 대규모의 병선을 동원한 자국 수군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전술이 백촌강에서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급하게 만든 배’는 항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당파’를 시도하자 부서져 나간 것은 오히려 일본 병선이었습니다. 맥없이 두 동강나는 일본 군함을 향해 역으로 당파작전을 실행한 것은 당나라 수군 함정 170척이었습니다. 당 수군은 일본 배를 모두 불태웠고 이 때 4만 명의 병사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백촌강의 전투에서 패함과 동시에 백제 부흥운동도 사실상의 종말을 고했습니다. 패전 보고를 받은 일본 조정에서 ‘이제 조상의 묘에 가서 성묘하기는 틀렸구나’라고 탄식했다는 기사가 <일본서기>에 보입니다.

왜 국제전 양상이었나

당시 전투에 나선 신라군 병력은 5만입니다. 일본이 백제를 구원하면서 상대했던 것은 신라만이 아닙니다. 당대 세계 최강이던 당나라의 군대였습니다. 일본 조정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백제가 그만큼 가까운 나라였기에, 단순한 우호국이 아니라 한 뿌리를 공유한 형제의 나라이거나 아니면 연방국에 가까운 정도로 긴밀한 관계였기에 국력을 기울인 총력전을 벌인 것이지요.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가야(伽耶)에 대해서도 비슷한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가야의 본점은 한반도, 지점은 일본입니다. 어느 날 본점의 핵심 인력이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지점으로 이주를 해 간 것은 아닐까요? 그렇지 않다면, 고대 사회에서 가장 뛰어난 제철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가야가 한반도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에 밀려 별다른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다는 사실이 잘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백촌강의 전투가 끝나고, 10만 명의 백제인이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바다를 건너온 사람, 즉 도래인(渡來人)이라는 단어가 생겨난 역사적 유래입니다. 지금의 기준으로도 10만 명은 적지 않은 숫자입니다. 하물며 고대사회에서 이겠습니까. 현대사회에서도 세계 각지에서 난민이 발생합니다. 어느 나라가 이들을 받아주느냐를 두고 선진국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전문 인력 10만’을 받는다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나라의 운영권을 상당부분 이들에게 내주어도 좋다는 정도의 각오가 없이는 선뜻 결정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10만 동시 망명’은 그만큼 백제와 일본이 긴밀한 관계였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닐는지요.

계백의 5000 결사대의 황산벌 전투(660)보다 더 큰 규모로 국제전 양상을 띈 채 격돌했던 전투가 백촌강의 전투입니다. 역사학자들이 백제의 진정한 멸망을 660년이 아니라 663년으로 꼽는 이유입니다. 어쩌면 한국과 일본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긴밀하게 얽혀있는 나라인지도 모르겟습니다.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혈연적으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