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최저임금이 9000원이건 1만원이건…
경제학자들만큼 서로 다투는 사람들도 없다. 저마다 자신의 진단이 옳고 처방이 달라야 한다며 늘 티격태격한다. 세금을 줄여줘야 한다면 더 걷어야 한다는 반론이 나온다. 성장이 우선이라는 주장에는 분배부터라는 주장이 맞선다. 고용, 재정 등 모든 이슈가 갈등의 대상이다.

최저임금제도는 그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감자다. 최저임금과 고용의 상관관계가 논쟁의 핵심이다. 물론 최저임금 인상은 고용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주류경제학의 오랜 정설이다. 여기에 1994년 앨런 크루거 프린스턴대 교수와 데이비드 카드 UC버클리 교수가 반론을 제기했다. 논쟁의 시발점이다.

진보 성향의 이들 계량경제학자는 최저임금을 인상한 뉴저지주와 그렇지 않은 펜실베이니아주의 패스트푸드산업을 비교했다. 그들의 결론은 뉴저지주의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 감소를 불러오지 않았으며 오히려 늘렸다는 것이다.

주류학계의 화살이 쏟아졌다. 특정 세력에 치우쳤다는 비난이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머튼 밀러의 “잘 구성된 여론조사일 뿐”이라는 평가는 오히려 점잖다. 역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뷰캐넌은 이들에게 ‘매춘부’라는 극언까지 퍼부었다. 일부 학자들은 두 사람이 전화설문을 통해 고용 자료를 수집한 데서 오류가 발생했다며 당국의 임금지급 통계를 사용하면 정반대 결론이 나온다는 반박 논문을 내기도 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의 주장은 최저임금 인상의 학술적 논거에 목말랐던 노동계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곳곳에 인용된다.

문제는 이론을 전달하다 보면 종종 조건을 무시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크루거와 카드도 무턱대고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과 무관하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약간(modest)의 인상’이라는 전제가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이론을 인용하면서 ‘모디스트’라는 표현을 제외시킨다. 지난해 논란이 된 경제 서적에서도 그렇다.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 ‘모디스트’라는 표현은 빼버린 채 그저 ‘인상(an increase)’이라고 인용하면서 최저임금의 대폭 인상을 주장했다. 반면 앵거스 디턴은 위대한 탈출에 ‘소폭 인상(small increases)’이라는 명확한 표현으로 인용했다. 큰 차이다.

그러면 얼마가 모디스트이고, 스몰일까. 한국의 최저임금은 최근 몇 년간 가파르게 올라 6030원이 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인상률이 가장 높은 나라다. 그런데도 선거철이 되자 더불어민주당은 2020년까지 1만원으로, 새누리당은 9000원으로 올리겠다며 경쟁적으로 표심을 자극하고 있다. 새누리 안이면 매년 약 10%씩, 더민주 안이면 매년 13.5%씩 올려야 한다. 터무니없다.

경제학자들은 대체로 ‘중위임금’의 50% 수준을 모디스트로 여긴다. 근로자들을 시간당 임금 기준으로 1위부터 최하위까지 나열했을 때 한가운데가 중위임금이다. 한국의 최저임금은 이미 중위임금의 45%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노동계는 중위임금보다 훨씬 높은 평균임금을 감안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지난해 최저임금위원회가 사용자 측 위원들의 반대에도 최저임금 산정에 평균임금을 감안키로 밀어붙인 배경이다. 평균임금을 감안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최저임금이 중위임금의 50%만 넘어도 저숙련공의 고용은 오히려 감소하는 탓이다. 크루거 교수조차도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미국 연방이 최저임금을 12달러라면 몰라도 캘리포니아주처럼 15달러까지 올린다면 고용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경고했을 정도다. 미국의 중위임금은 17달러다.

빈곤 감소에도 최저임금제도는 효과적이지 않다. 새누리당의 공약에 대한 뒤늦은 변명처럼 근로장려세제 같은 다양한 사회보장제도와 연계해야 효과가 있다.

9000원이나 1만원이나 그게 그거다. 경제관료로 나라살림을 주물렀던 강봉균 새누리 선거대책위원장이나 경제학자로 정·관계를 누빈 김종인 더민주 대표나 경제를 모르긴 오십보백보다. 최저임금마저 오로지 정치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20대 국회도 19대 국회와 달라질 게 없다. 투표를 포기하는 유권자들이 늘어날 수밖에. 걱정이다.

김정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