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숨은 경제이야기] 조선의 왕들이 가체(가발)를 법으로 금지한 까닭은?
가발은 1960년대 한국 수출을 이끈 대표적인 효자 상품 중 하나다. 부존자원이 빈약하고 가공기술도 일천하던 과거, 가발은 섬유와 함께 우리에게 외화를 벌어다주는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견인차로 자리매김했다. 이보다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가발에 대한 인식이 호의적이지 않던 시절도 있다. 아니 호의적이지 않은 정도를 뛰어넘어 가발 착용을 위법 행위로 규정짓고 금기시한 때도 존재한다. 조선의 마지막 황금기를 연 영·정조 시대가 바로 그때다. 가발의 역사는 기원전부터 시작됐다. 고대 이집트 벽화를 보면 다양한 계층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가발을 착용하고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이집트인들은 건강과 미용을 위해, 한편으로는 신분을 나타내는 표식으로 가발을 즐겨 썼다. 이때의 가발은 주로 신분과 비례해 그 크기와 화려함이 결정됐는데, 벽화에 따르면 왕이나 귀족들은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가발을 즐겨 썼고, 평민들은 짧은 가발을, 노예들은 가발을 착용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357년 고구려 고국원왕 시절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안악3호분(황해도 안악군)을 통해 가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고분의 앞방 서쪽 남벽에는 지체 높은 부인과 그를 모시는 시녀들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이들 모두 머리를 올린 듯한 모양의 가발을 착용하고 있다. 또한 통일신라 시대에는 당나라에 가발을 전달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런 전통은 수백년이 지난 조선시대로까지 이어져 조선 왕실이 중국에 보내는 조공품 목록에 가발(가체)은 빠지지 않는 단골 품목 중 하나였다.

조선시대 가발은 예의를 갖춘 선물로서 국가 간 외교 도구로 활용됐을 만큼 대접받던 물건이었다. 그러다 보니 조선 왕실에서도 가발을 가례(嘉禮) 등의 주요 의식이나 예식에 널리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 가발은 고구려, 신라, 조선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상류층 전유물과도 같은 호사하고 귀한 물건이었음에 틀림없다. 조선 시대 왕실에서 사용한 물품을 분류정리해 설명한 《탁지준절(度支準折)》이라는 책을 보면, 당시 가체를 완성하는 데 20냥이 소요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는 당시 황소 한 마리 가격에 버금가는 엄청난 금액이다. 한마디로 조선시대의 가발은 요즘의 명품과도 같은, 어쩌면 그 이상이었을지도 모르는, 시대를 대표하는 사치품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사치품이라 부르는 재화들은 종종 경제학의 금과옥조(金科玉條)를 거스르는 경향을 나타내기도 한다. 사치품을 소비할 때 발견되는 ‘베블런 효과(veblen effect)’가 바로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경제학에서 말하는 상품에 대한 수요는 가격에 반비례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어떤 재화나 서비스 가격이 상승(하락)하면 소비자는 해당 재화나 서비스 수요를 줄인다(늘린다)는 것이다. 가격과 수요량 간에 음(-)의 상관관계가 성립한다는 얘기다. 베블런 효과가 나타나는 상품의 수요는 가격에 비례하는 양상을 보인다. 가격이 비싸져도 수요가 감소하지 않고 오히려 증가하는 비합리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 베블런 효과다. 이런 현상은 주로 우리가 사치품이라고 부르는 고가(高價) 제품군에서 목격된다.

그렇다면 유독 사치품에서 베블런 효과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베블런 효과를 처음 주창한 미국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소스타인 베블런은 재화가 고가임에도 수요가 많아지는 것은 인간의 지위 또는 신분에 대한 열망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저서 《유한계급론》에서 “고가 물건을 과시적으로 소비하는 것은 소비자 자신의 부와 능력을 자랑하기 위한 것으로, 이들은 과시적 소비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확인시키고 드높이고자 노력한다”고 했다. 대부호, 귀족 등 상류계급은 비록 비합리적이라도 그것이 자신의 신분을 뽐낼 수 있는 것이라면 과시적 소비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 나타난 가발의 유행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가격이 소 한 마리와 비슷하던 가발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계층 여성들에게서 목격된다. 왕실이나 반가 여성이야 가체를 착용하는 것이 당시 풍습이었지만 조선 후기에 와서는 신윤복 풍속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기녀들조차 화려한 가발로 자신을 꾸몄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여성에게 가발은 신분을 뛰어넘어 모든 이에게 사랑받은, 시대를 풍미한 패션 소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베블런이 지적한 과시적 소비와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궁중 주요 행사 때나 착용되던 고가의 가체를 천민 대접을 받던 기생이 사용했다는 것은 미적 욕구에 더해 상류층 모방을 통해 신분 상승 욕망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가체 가격에 있었다.

사람 머리카락이 원료인 탓에 원래부터 고가이던 가체는 유행으로 공급이 수요를 쫓아가지 못하자 가격이 치솟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남들보다 더 훌륭한 가체를 가지고 싶어 하는 여성들의 욕망이 가체 크기를 키웠고 금은보화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가체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자 곳곳에서 폐단이 발생했다. 일부 여성은 가체는 만드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고, 어떤 가체는 웬만한 집 한 채 가격에 버금가기도 했다. 심지어 어느 집 며느리는 시부모에게 인사를 드리다 가체 무게를 못 이겨 목뼈가 부러져 사망하기도 했다.

[역사 속 숨은 경제이야기] 조선의 왕들이 가체(가발)를 법으로 금지한 까닭은?
가체로 인한 사치의 폐해가 극심해지자 이 문제가 어전에서 언급되기에 이른다. 조정 신하들이 상소를 통해 가체로 인한 폐단과 문제점을 끊임없이 왕에게 지적한 것이다. 가체의 사치 현상은 영정조 시대에 극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로 인해 두 왕은 재임기간에 가체 사치를 막기 위한 여러 방편을 마련했고, 종국에는 가체 착용을 금지하는 법률을 공포하기에 이른다. 영조는 가체금지령을 내려 가체 사용을 금지하고 가체 대신 족두리를 착용하게 했다. 정조는 가체신금사목(加申禁事目)을 반포해 가체 착용을 금지하는 한편, 이를 어길 경우 국법에 따라 엄히 다스릴 것이라고 천명했다.

영·정조 때의 가체금지령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철폐됐다. 영조의 금지령은 가체의 유행과 그로 인한 사치를 막기는커녕 되레 족두리에 대한 사치만 부추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정조 때도 이런 현상은 마찬가지여서, 가체신금사목 반포에도 불구하고 가체 유행은 계속됐고 아들대인 순조 때에 이르러 비로소 가체에 대한 사치가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원식 < KDI 전문연구원 kyonggi96@kdi.re.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