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Z Insight] '시계는 패션소품' 역발상이 스와치 살렸다
손목시계의 기원은 1571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애인 로버트 더들리 백작으로부터 선물받은 시계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시계가 본격적인 패션 소품으로 대중 사이에 자리 잡은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1983년 ‘스와치’라는 브랜드의 탄생은 시계를 패션의 한 부분으로 분명히 인식시키는 계기가 됐다.

[BIZ Insight] '시계는 패션소품' 역발상이 스와치 살렸다
스위스 시계 산업은 1980년대 수정진동자(쿼츠) 시계의 공세로 큰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혁신을 앞세운 스와치그룹은 저가부터 초고가에 이르기까지 19개의 시계 브랜드를 거느린 세계 최대 시계업체로 성장했다. 지난해 매출 84억5100만스위스프랑(약 10조2800억원), 영업이익 14억5100만스위스프랑(약 1조7600억원)을 기록했다.

쿼츠 시계 공세 속 탄생한 스와치그룹

[BIZ Insight] '시계는 패션소품' 역발상이 스와치 살렸다
스와치그룹의 성공기는 저가 제품과의 경쟁에 직면한 세계 곳곳의 기업에 좋은 교훈을 준다. 1970년대 쿼츠를 채택한 일본과 홍콩, 대만 업체들의 저가 공세로 부도 위기에 몰린 스위스 시계업체들이 합쳐 세운 것이 스와치그룹이기 때문이다. 스와치그룹의 성공 비결은 시계를 패션 소품으로 변화시킨 역발상과 저가부터 최고가까지 모든 가격대의 고객을 만족시키는 ‘3단 케이크’ 전략으로 요약된다.

1970년대까지 스위스 시계는 세계 시장 점유율의 절반을 차지하며 탄탄한 위상을 자랑했다. 하지만 1980년대 일본 업체인 세이코와 카시오, 홍콩 업체 등이 부상하면서 고사 직전에 놓였다. 세이코는 1969년 세계 최초의 상용화 쿼츠 시계인 ‘아스트론’을 개발했다. 작은 태엽과 톱니바퀴로 움직이는 기계식 시계와 달리 쿼츠 시계는 수정진동자와 작은 배터리만 있으면 됐다. 복잡한 부품이 필요 없어 매우 저렴했고, 정확도도 기계식 시계보다 높았다. 세이코가 1970년 쿼츠 특허를 공개하면서 전 세계 시계업체들이 쿼츠 시계를 쏟아냈고 기계식을 고집한 스위스 시계의 설 자리는 점점 좁아졌다.

채권단인 스위스 은행들은 오메가 등 시계업체를 세이코나 카시오 등에 매각할 생각까지 했다. 제값을 받고 팔려면 일단 구조조정을 해야 했다. 그래서 당시 유명 컨설팅업체인 하이에크를 운영하던 니컬러스 하이에크에게 맡겼다. 하지만 하이에크의 생각은 달랐다. 스위스 시계 산업의 자생력이 충분하다고 본 것이다.

예를 들어 100여곳의 독립 시계업체가 뭉친 회사인 ASUAG는 마케팅과 연구개발(R&D), 조립 등을 따로 하다 보니 비용 부담이 컸다. 하이에크는 생산공정과 부품을 공유하고 표준화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비용 절감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1983년 ASUAG를 오메가·티쏘 등을 보유한 SSIH와 합병하고 자신의 돈과 투자자로부터 받은 돈을 투입해 지주회사인 SMH를 설립했다. 자신이 직접 경영을 맡아 스위스 시계 산업을 살려보겠다는 복안이었다. SMH는 1998년 회사 이름을 ‘스위스’와 ‘시계’의 합성어인 스와치그룹으로 바꿨다.

“저가 시장 장악 없이 미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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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치그룹은 우선 저가 시장 공략에 집중했다. 하이에크는 “세계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저가 시계를 장악하지 못하면 스위스 시계 산업의 미래는 없다”고 직원들에게 강조했다. 저가 시계 시장은 이미 아시아 업체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격 외에 다른 차별점이 필요했다.

스와치그룹이 주목한 것은 패션이다. 사람들이 옷을 여러 벌 사는 것처럼 시계도 옷과 색상, 분위기에 맞춰 여러 개 구입할 수 있다는 발상이었다.

쿼츠를 채택한 스와치 브랜드 시계는 플라스틱 시곗줄에 알록달록한 색상을 넣은 파격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백남준을 비롯해 키스 해링, 키키 피카소, 알프레드 호프쿤스트 등 세계적인 예술가와의 공동 작업으로 소비자의 수집 욕구를 자극했다.

스와치는 같은 제품을 3개월, 길어도 1년 이상 매장에 진열하지 않는다. 한 번 선보인 제품은 아무리 인기를 많이 끌더라도 재출시하지 않는 것도 원칙이다.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의 희소성을 높이는 것과 함께 최신 트렌드를 재빨리 반영하기 위해서다.

제조 비용도 대폭 줄였다. 100여개인 부품을 50여개로 줄였다. 그전까지 케이스 따로, 부품 따로 조립해 나중에 둘을 끼워 맞추던 것을 케이스 안에 곧바로 부품을 조립해 넣는 단일 제조공정으로 개선했다. 일본 시계는 정확했지만 패션과 스타일에서 밀렸고, 스와치는 저가 시장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저가에서 고가로 ‘3단 케이크’ 전략

하이에크가 저가 시장을 장악하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고 말한 것은 ‘3단 케이크’ 전략으로 설명된다. 한 해 5억개의 시계가 팔린다고 하면 그중 4억5000만개는 75달러 이하, 4200만개는 400달러 이하 제품이 차지한다는 것이다. 나머지 800만개의 고가 시계는 케이크의 최상단을 차지한다.

스위스 시계는 전통적으로 이익률이 높은 고가 제품에 집중해왔지만 스와치그룹은 가격 단계별로 모든 고객을 공략하는 전략을 썼다. 고가 시장에서 힘을 내려면 저가 시장에서의 방어력이 필수적이란 이유에서다. 변방을 내주면 여기서 실력을 키운 경쟁 업체들이 고가 시장에 도전하면서 언젠가 중심부도 타격을 받을 것이란 예상이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저가 제품으로 진입한 고객이 상단으로 이동하면서 고가 제품의 매출도 늘어날 것이란 점이었다.

스와치그룹은 1992년 블랑팡, 1999년 브레게, 2000년 글라슈테 오리지널, 2013년 해리 윈스턴 등을 사들이며 보유 브랜드를 늘렸다. 현재 스와치그룹은 수천만원대의 브레게와 블랑팡, 자케드로뿐 아니라 수백만원대의 오메가, 200만~300만원대의 론진과 라도, 그 이하의 티쏘와 해밀턴, 미도, 그리고 저가의 스와치까지 소비자의 모든 수요를 충족하는 브랜드 라인업을 갖추고 있다.

스와치그룹 회장이자 스위스 시계 산업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불린 하이에크는 2010년 6월28일 스위스 비엘의 사무실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첫째 딸인 나일라가 그룹 회장을 이어받았고, 아들 닉은 최고경영자(CEO)를 맡았다. 나일라의 아들이자 창업자의 손자인 마크 알렉산더 하이에크는 블랑팡, 자케드로, 브레게의 대표를 맡고 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