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Z Insight] 신발회사 크록스 CEO 그레그 리밧…'신발  DNA' 물려받은 패션전문가
2002년 등장한 미국 신발회사 크록스는 글로벌 패션업계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구멍이 숭숭 뚫린 플라스틱 신발인 크록스의 간판제품 ‘클로그’는 알록달록한 색상, 가볍고 편안한 착용감 등을 앞세워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이 신발은 애초에 장시간 서서 근무하는 사람들을 위해 고안됐지만 실용성이 부각되면서 전 연령층에 사랑받았다. 그 덕분에 2003년 120만달러(약 14억원) 수준이던 매출은 4년 뒤 8억5000만달러(약 1조원)까지 급성장했다. 2006년 나스닥시장에 상장한 데 이어 세계 90여개국에 진출하며 승승장구했다.

샌들에 집중하던 제품군을 고가 가죽제품 등으로 확대하고 해외 판매망을 단기간에 늘리면서 곳곳에서 부작용이 속출했다. 제품이 판매점에 제때 도착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제품 수요에 대한 정밀한 조사 없이 생산량을 늘렸다가 재고 부담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2013년 크록스의 글로벌 매출은 12억달러에 달했지만 이익은 전년보다 92% 급감한 1040만달러에 불과했다. 주가는 기업공개 때보다 43% 떨어졌고, 2007년 고점과 비교하면 84%나 하락했다. 크록스 이사회는 위기를 수습할 구원투수가 절실했다. 1년 가까이 후보를 물색한 끝에 기능성 속옷 전문회사 스팽스의 임시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던 그레그 리밧을 2015년 1월 새 CEO로 영입했다.

“내 안엔 신발 만드는 DNA가 있다”

리밧은 “어릴 때부터 신발 비즈니스를 매일 접하며 자랐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신발 깔창(인솔)을 생산하는 기술자였다. 할아버지는 신발 틀을 제조해 팔았다. 리밧의 아버지는 신발회사에서 평생 배필을 만났다.

리밧은 경제잡지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야구장에 가는 길에 친구 아버지들은 핫도그 가게에 들렀지만 내 아버지는 구두 가게에 들러 신상품을 구경할 정도로 신발을 좋아했다”고 회상했다.

인문학으로 유명한 미국 동부의 웨슬리언대를 졸업한 리밧은 시카고대 경영대학원에 진학해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았다. 곧바로 그가 잡은 직장은 패션업체인 베넷풋웨어그룹이었다. 여성용 구두와 가죽제품, 액세서리 등 여러 브랜드를 보유한 이 회사에서 그는 11년 동안 일하면서 신발을 비롯한 패션 및 소비재 분야를 두루 경험했다.

최고운영책임자(COO) 겸 부사장까지 오른 리밧은 2005년 회사를 또 다른 패션기업인 브라운슈즈에 매각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그는 명품 여성구두 브랜드인 스튜어트 와이츠먼을 거쳐 2008년 패션기업 컬렉티브브랜즈 CEO로 취임했다. 컬렉티브브랜즈는 캐주얼화인 케즈, 어린이용 신발인 스트라이드라이트, 아웃도어 신발 스페리 등 다양한 신발 브랜드를 보유한 회사였다. 리밧은 4년에 걸쳐 이 회사의 가치를 끌어올려 울버린월드와이드에 12억4000만달러(약 1조4800억원)에 매각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베넷풋웨어그룹과 컬렉티브브랜즈를 거치면서 리밧은 풍부한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패션기업의 실적을 개선하는 ‘턴어라운드 전문가’로 자리매김했다. 크록스 경영진이 그를 눈여겨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본에 충실한 크록스로 돌아가자”

2015년 크록스 사령탑을 맡은 리밧은 조직 재정비를 서둘렀다. 단기간 급성장하면서 불거진 조직의 비효율성을 바로잡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해서다. 우선 해외 지역별로 흩어져 있던 마케팅 조직을 글로벌마케팅본부로 단일화했다. 수익이 나지 않는 점포는 과감하게 정리했다. 생산량도 수요에 맞춰 줄이고 도매판매 조직을 추슬렀다. 제품 종류는 절반으로 확 줄였다. 대신 회사의 간판 제품인 클로그와 샌들류에 집중했다.

2015년 6월엔 뜻하지 않은 행운도 따랐다. 영국 윌리엄 왕세손과 케이트 미들턴 왕세손빈 부부의 두 살난 아들인 조지 왕자가 남청색 크록스 신발을 신고 왕실 잔디밭을 뛰어다니는 모습이 파파라치의 사진을 통해 공개된 것이다.

1주일 동안 전자상거래업체 아마존의 영국 사이트엔 크록스 주문이 쇄도해 매출이 평소의 16배까지 치솟기도 했다.

조지 왕자의 사진은 ‘반짝 매출’ 이상의 효과를 발휘했다. 크록스는 처음 출발할 때부터 마니아와 싫어하는 층으로 시장의 반응이 확연히 갈렸다. 가볍고 편안해 실용적이긴 하지만 플라스틱 신발이란 이미지를 꺼리는 소비자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부드러운 재질의 크록스 신발이 에스컬레이터에 끼면서 수차례 사고까지 발생해 안전성 문제도 자주 제기됐다. 하지만 ‘영국 왕실에서도 크록스 신발을 신는다’는 인식은 우호적인 팬을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Fun(즐거움) 마케팅 시동

조직 효율화 작업을 마친 리밧은 ‘Find Your Fun(당신의 재미를 찾으세요)’ 슬로건을 내걸고 새로운 마케팅을 시작했다. 크록스 특유의 경쾌한 이미지를 살려 소비자 스스로 제품을 조합해 즐거움을 누리도록 유도하겠다는 전략이다. 크록스의 원조 제품인 클로그를 비롯해 샌들류를 강화하는 동시에 젊은 소비자층을 겨냥한 캐주얼화 종류도 추가했다. 리밧은 “글로벌 캐주얼화 시장에서 선두 브랜드로 크록스가 자리매김하는 것이 목표”라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시장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포브스는 “리밧이 CEO에 취임할 당시 크록스 주식에 ‘매수’ 의견을 낸 애널리스트는 10%에 불과했지만 6개월 만에 이 비율이 55%까지 올랐다”고 보도했다. 크록스는 성장성이 높은 아시아 지역에도 주목하고 있다. 한국 중국 일본 등은 리밧 CEO가 꼽은 ‘핵심 국가(key country)’다.

리밧은 지난해 취임과 함께 세계 최대 사모펀드(PEF)인 블랙스톤에서 인연을 맺은 제이슨 지오다노를 크록스 이사회 멤버로 영입했다. ‘신발 박사’ 리밧이 투자 전문가 지오다노와 손잡고 캐주얼화시장에서 어떤 새로운 변화를 시도할지 패션업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박해영 기자 bon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