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오곡도시락
그늘진 밥상에도 볕 들 날이 있었다. 명절이나 제사·잔칫날은 식구들 얼굴이 환해졌다. 정월 대보름 밥상도 푸짐했다. 설날 포만감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오곡밥(五穀飯)에 나물, 부럼까지 가득했다.

오곡밥은 글자 그대로 다섯 가지 곡식을 섞어 지은 밥을 말한다. 풍년을 기원하는 뜻에서 농사밥이라고도 하고, 대보름에 먹는다 해서 보름밥이라고도 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찰밥, 잡곡밥, 오곡잡밥 등으로 다양하게 부른다. ‘동국세시기’에는 오곡잡반(五穀雜飯)이라고 표기돼 있다. ‘정월 대보름날에 오곡잡반을 지어 이웃과 나누어 먹는다. 영남 지역에서는 하루 종일 이 밥을 먹는다. 이는 제삿밥을 나눠 먹는 옛 풍습을 본받은 것이다.’

오곡밥의 주재료는 찹쌀, 팥, 수수, 차조, 콩이지만 기장을 넣기도 한다. 찹쌀이나 차조같이 찰기 많은 곡식을 넣은 것은 영양가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삼국유사’에도 ‘찰밥’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아마도 평소 자주 먹지 못하던 것을 보충해 준다는 의미가 클 것이다. 여기에 다양한 나물과 호두, 밤, 잣 등을 곁들였으니 균형 잡힌 건강식이 따로 없다.

오곡밥은 하루에 아홉 번 먹어야 좋다고 해서 여러 차례 나눠 먹기도 했다. 이렇게 자주 조금씩 나눠 먹는 풍속은 한꺼번에 과식해서 배탈 나는 것을 방지하고 한 해 농사를 부지런히 짓자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소에게도 먹였는데, 농가에서 가장 큰 일꾼인 소가 잘 먹고 힘을 길러야 일을 잘하고 풍년도 든다는 뜻이리라.

식품영양학자들에 따르면 오곡밥의 열량은 같은 양의 쌀밥보다 20% 정도 낮고 영양은 훨씬 많다. 수수와 조의 추출물은 혈당 상승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어 당뇨병 예방에 좋은 것으로 확인됐다. 식이섬유가 풍부하고 암세포 억제 성분이 있어 성인병 치료 효과도 있다. 팥에 많이 들어 있는 칼륨은 나트륨 배출을 촉진하기 때문에 짜게 먹는 사람들의 부기를 빼는 데 좋다고 한다. 함께 먹는 나물에 비타민과 무기질이 풍부한 것까지 생각하면 선인들의 섭생 지혜가 놀랍다.

다만 한 가지, 음식 장만이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집에서 일일이 만들어 먹기에는 시간과 품이 너무 많이 든다. 그나마 요즘은 오곡도시락이 생겨 간편하게 사 먹을 수 있게 됐다. 표고버섯, 무, 참나물 등 6가지 나물에 불고기, 떡갈비까지 넣은 도시락이 6500원 정도면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도 좋은 편이다. 설날 노역에 시달린 주부들로선 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