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입양
“그 시절엔 유학길에 항공료 아끼느라 입양아를 안고 갔죠. 앵커리지를 경유해서 파리까지 꼬박 하루가 걸리는데 공항에서 아이를 넘겨줄 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어요.” 이런 ‘입양아 배송’은 6·25전쟁 이후 60년간 이어졌다. 그렇게 미국, 프랑스, 스웨덴 등으로 보내진 입양아는 거의 22만명이다.

엊그제 프랑스 국가개혁장관에 임명된 한국계 입양인 장 뱅상 플라세(47)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고아원에서 한국명 권오복으로 자라다 7세 때 파리 샤를 드골공항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양아버지는 프랑스 북부 해안도시 노르망디에서 일하는 변호사였다. 그곳에서 양부모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그는 25세에 정계에 진출해 43세에 상원의원이 됐고 47세에 장관이 됐다.

그의 성공 뒤에는 양부모의 각별한 사랑이 있었다. 피부색이 다른 것 때문에 학교에서 놀림을 당하지 않도록 친구들에게 배려를 부탁했고, 나폴레옹을 좋아하는 그를 위해 온갖 책을 다 구해다 줬다. 모국을 잊지 말라며 한국어를 배우라고 권하기도 했다. 양부모가 자신을 한국으로 돌려보낼까봐 겁이 나서 한국말 배우기를 거절할 정도였다.

그가 장관에 임명된 날 퇴진한 문화장관 플뢰르 펠르랭(한국명 김종숙·43)도 그랬다. 그의 이름 플뢰르는 프랑스어로 ‘꽃’을 뜻한다. 얼마나 귀했으면 그렇게 불렀을까.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어머니에게 글을 배운 덕분에 그는 공부를 잘했고 피아노와 노래도 수준급이었다. 최고 수준의 상경계 그랑제콜 에섹(ESSEC)과 파리정치대학, 국립행정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최근 한국에서 결혼한 미국 입양아 출신 앤드루 머피(한국명 장태수·28)는 어떤가. 켄터키주의 스콧 머피·리엔 머피 부부에게 입양된 그는 네바다주립대 대학원을 거쳐 교사로 근무하다 한국으로 와 서울대 국제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한국 여성과 제2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한국인에게 미국은 강대국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입양인으로 자란 내가 볼 때 미국은 부모의 사랑과 교육, 인권을 중시하는 나라”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국내 입양조차 후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다. 어쩌다 입양을 결정해도 파양으로 귀결되기 일쑤다. 뿌리 깊은 순혈주의와 배타성 때문이다. 이런 편견이 ‘입양 수출’ 1위라는 오명을 낳았다. 선진국 부모들의 개방성과 도덕성을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갈 곳 없는 탈북아동이나 베트남·필리핀 2세까지 거부하는 상황이니 더욱 씁쓸하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