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구조조정은 휴비스처럼
“회장님 이렇게 가면 모두 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2000년 봄 어느 날 최창원 SK케미칼 부회장이 김윤 삼양사 회장에게 말을 꺼냈다. 당시 화섬업계는 공멸 직전이었다. 1990년대 13개 업체가 난립해 설비를 확장한 결과였다. 외환위기도 있었다. 중국이 수십개 공장을 지어댄 것은 결정적 타격이었다. 고합 등은 부도 위기에 몰렸다. 삼양사와 SK케미칼도 1999년 수백억원씩 적자를 냈다.

최 부회장의 제안에 김 회장은 이렇게 답했다. “그렇겠지요. 한번 합쳐봅시다.” 두 사람의 의기 투합을 계기로 양사는 협상을 시작했다. 주력인 화섬부문을 떼어내 합작법인을 세우는 협상이었다. 6개월 만에 협상을 마무리했다. 그해 11월 세계 5위권 폴리에스테르 업체인 휴비스가 출범했다.

생존보다 성장 위한 선택

15년 전 얘기를 꺼낸 이유는 구조조정 이슈가 산업계를 휩쓸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강제 합병설, 좀비 중소기업 퇴출설까지 다양한 얘기가 나온다. 정부가 앞장서고, 국책연구원이 밀며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다. 의문이 들었다. ‘이번 구조조정의 목표는 무엇일까. 구조조정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부작용에 대해 생각해 봤을까.’

기업인들도 이런 의문을 갖고 있다. 중견기업 최고경영자(CEO) S씨는 “구조조정을 하려면 휴비스처럼 해야 하는데, 정부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구조조정의 목표는 성장이었다. 실제 휴비스는 그랬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기 전 합병을 택했다. 하지만 ‘세계적 폴리에스테르 기업’이란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 합작법인 출범 후 인원을 한 명도 줄이지 않았다. 합병 과정에서 임금과 복지 체계도 높은 쪽에 맞춰 줬다. 성장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합병 후 3년간 회사를 스스로 나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휴비스는 출범 이듬해 흑자로 전환했고, 지금은 신사업을 통해 또 다른 성장을 준비하고 있다.

정책 목표의 불분명함이 낳는 부작용은 크다. 많은 중견기업과 중소기업이 채권 만기 연장 등에 애를 먹고 있다. 다른 중견기업 CEO의 말이다. “만기 연장이 훨씬 까다로워졌고 2, 3년 해주던 연장도 1년밖에 안해줍니다.” 정부의 구조조정 메시지는 금융회사들을 움츠러들게 하고 있다. 산업계에서 “이번 구조조정의 목표는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려는 것”이라는 불만이 나오는 이유다.

오너의 결단과 실행이 관건

그러나 불만만 늘어놓고 있을 만큼 상황이 한가하지 않다. 경제부처 장관을 지낸 L씨는 “강제 합병이나 퇴출은 외환위기 같은 때나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지금은 그런 시기가 아니란 얘기다. “어떤 때입니까”라고 묻자 “기업들이 스스로 나서야지”라고 답했다. 미리 준비하라는 얘기였다. 휴비스도 그랬다. 정부의 입김은 없었다. 부도날 정도는 아니었다. 모기업도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선제적으로 합병을 추진했다. 협상 과정에 위기도 있었다. 그때마다 삼양사와 SK 오너가 나섰다. 그들은 “우리가 양보해서라도 협상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오너의 위기의식과 결단은 휴비스를 구조조정의 모범사례로 만들었다.

‘정부는 기업의 운명을 결정짓는 구조조정을 치적으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 경영자들은 불만을 토해내기보다 위기의식을 갖고, 선제적 구조조정에 나서야 한다.’ 휴비스 구조조정이 15년 후 한국 경제에 던지는 메시지다.

김용준 중소기업부 차장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