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페라 가수 이사벨 "입술 얼어도 사랑 전하는 거리는 훌륭한 무대"
12월의 첫날 오후 3시께 서울 광화문 앞 세종로사거리에선 평소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한 여성이 높고 청아한 목소리로 빨간 코트를 입고, 구세군 자선냄비 옆에서 기쁨에 가득 찬 표정으로 ‘타임 투 세이 굿바이(Time to say goodbye)’를 부르고 있었다. 주변엔 이내 20여명의 청중이 모여들었다. 그중 몇 명은 자선냄비에 지폐를 넣었다. 마이크를 든 여성은 노래를 부르는 중간중간 기부자들에게 “고맙습니다. 행복하세요”라고 감사 인사를 했다.

공연의 주인공은 팝페라 가수 이사벨(본명 조우정·사진)이다. 2013년 방영된 이승기 배수지 주연의 드라마 ‘구가의 서’ 주제곡 ‘마이 에덴(My Eden)’으로 유명한 그는 올해로 8년째 구세군 자선냄비 친선대사로서 모금 기간에 거리 공연을 하고 있다. 그가 노래하는 순간엔 광화문 앞이 ‘화합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각종 시위 구호도 그때만큼은 사그라들고 모두가 그에게 박수를 친다. “입술이 얼고 떨려 힘들 때가 많고, 추위에 기계가 고장나서 반주가 끊기기도 해요. 하지만 노래를 듣는 분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거리 공연을 멈출 수 없습니다.”

이사벨은 미국에서 촉망받는 성악가였다. 일곱 살 때 음악을 시작해 열여섯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보스턴의 명문 음대 뉴잉글랜드컨서버토리(NEC)에 입학했고, 졸업 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에서 프리마돈나로 활동했다.

하지만 2003년 오페라단 활동 중 갑자기 슬럼프에 빠져 6개월간 목소리를 잃었다. 말은 평소처럼 할 수 있었지만 노래를 부르려 하면 쉰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의 스승들은 “꼭 오페라가 아니어도 좋으니 부담을 털고 다시 노래할 수 있길 바란다”며 팝페라 장르를 소개했다. 그렇게 팝페라 가수로 전향했다.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미국 최초로 꾸려진 혼성 팝페라 그룹 ‘WIN’의 리더를 맡은 이사벨은 2004년부터 3년간 음반작업을 한 뒤 주요 음반기획사를 대상으로 쇼케이스를 마치고 2007년부터 정식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WIN 제작자의 재정 지원을 맡았던 리먼브러더스가 2008년 9월 파산하면서 그룹은 해체됐다. 그해 부모님이 계신 한국에 와 팝페라 가수로 서서히 이름을 알리려 했지만 국내 음악계에 인맥이 전혀 없었던 그는 매니지먼트 관련 사기를 많이 당했다.

지난해엔 후두양성종양이 생겨 하마터면 가수 인생을 접을 뻔했다. “종양 수술 후 성대를 다칠 수 있다”는 의사의 설명을 듣고 “다시 노래할 수 있다면 세상을 위해 노래하겠다”고 기도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성대에도 이상이 없었다.

이사벨이 구세군 자선냄비와 인연을 맺은 건 2008년 초였다. 서울역 앞에서 노숙자들을 본 뒤 큰 충격에 빠졌고, 뭔가 도울 방법을 찾으려다 무작정 구세군에 “자선 공연을 하고 싶다”고 연락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첫 공연을 시작했다. “명동에서 공연했을 때일 겁니다. 노래를 하는데 갑자기 옆에서 뽑기를 파는 노점상 할머니께서 ‘장사 안되게 이게 무슨 짓이냐’며 절 밀치셨어요. 재미있는 건 공연을 보러 주변에 모인 분들이 근처 노점에서 간식거리를 많이 사 오히려 그날 장사가 더 잘됐다는 거예요. 그 할머니께서도 나중엔 제 노래를 박수치며 들어주셨어요.”

그는 “가진 능력이 노래하는 것밖에 없어 제가 나눌 수 있는 것도 노래밖에 없다”며 “그래도 세상을 위해 조금이나마 뭔가 할 수 있다는 게 행복하다”고 말했다. “제겐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겨울날 이 거리가 제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무대예요. 앞으로도 이 거리 위에서 최선을 다해 따뜻함을 전하겠습니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