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책 읽는 소리 사라진 사회
대한민국은 1년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축복받은 땅이다. 메말랐던 가지에 다시 초록빛이 돌고 화사한 꽃들이 만발하는 싱그러운 봄은 말할 것도 없지만, 무성한 나뭇잎들이 마치 꽃처럼 변화하는 상쾌한 가을이야말로 무엇을 해도 좋은 넉넉한 계절이다. 이맘때가 되면 예전에는 항상 ‘독서의 계절’이라며 책 읽기가 강조되곤 했는데 이젠 모두가 인터넷에 매달려 있기 때문인지 듣기 힘든 말이 됐다.

잘 아는 바와 같이 구텐베르크에 의한 금속활자 발명은 약 500년 전이다. 우리 민족은 금속활자를 그보다 훨씬 먼저 발명했는데, 실제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직지심체요절은 구텐베르크의 첫 인쇄보다 78년이나 앞선 것이다. 이것은 당시 고려가 인쇄 기술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앞섰던 나라임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일이다. 그러나 활자를 이용한 책자가 대량으로 제작되지는 않았고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지도 못했다.

반면 서양에서는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자가 널리 보급되면서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는데, 그중 가장 두드러진 예는 마틴 루터가 1517년에 출판한 95개 조의 논제라는 책일 것이다. 이 책은 발행 부수가 30만부를 초과했는데, 이는 당시의 사회 경제 규모에서는 그야말로 초(超)밀리언 셀러였다.

종교개혁도 결국 그 불씨는 루터가 쓴 이 한 권의 책이었고, 이 책을 읽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역사가 펼쳐진 것이다. 종이와 인쇄가 있는 곳에 혁명이 있다는 말도 있지만 책 읽는 사회가 진보하고 혁신하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19세기 중엽, 예를 들어 1850년의 시점에서 세계를 돌아보면 산업혁명으로 근대화된 서구는 아편전쟁을 거치며 이미 중국을 잠식하고 있었다. 조선과 일본 두 나라도 풍전등화 같은 신세였는데, 어쩌면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하늘이 두 나라에 각각의 미래 지도자를 보낸 것 같다.

1852년 8월에 조선에서는 고종황제가, 그리고 한 달 후에는 메이지 일왕이 태어난다. 두 사람은 모두 10대 초반에 즉위해 그 후 고종은 44년간을, 메이지는 45년간을 나라의 최고지도자로 일했는데, 그 기간 동안 조선은 안타깝게도 세계지도에서 사라지고 일본은 열강으로 올라섰다. 국가 지도자의 역할은 이처럼 중요한 것이다.

만약 메이지가 이 땅에서 태어나고 고종이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두 나라의 운명은 어찌 됐을까. 워낙 말도 안 되는 가정이기에 생각할 일도 못 되지만, 지도자의 역할과 더불어 간과하면 안 될 점은 일본이야 말로 전형적인 책 읽는 사회라는 사실이다.

일본 최고액 지폐인 1만엔권에 초상화가 올라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그런 의미에서 일본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사람이다. 그가 서양을 돌아보고 1866년에 펴낸 서양사정(西洋事情이라는 책은 단번에 20만부가 팔렸는데, 그 무렵 3500만명 정도의 일본 인구를 고려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며 서양을 학습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수년 후 다시 그가 저술한 학문의 권장은 오늘날까지 약 400만부가 팔렸다. 이처럼 일본 근대화를 이룬 주역은 책 읽는 일본 국민이었다.

기네스북에 의하면 지금까지 약 50억권이 팔린 기독교의 성경을 필두로 한때 중국인 모두가 지녀야 했던 마오쩌둥 어록집, 그리고 이슬람교의 코란이 3대 베스트 셀러다.

오랜 기간 정기적으로 보완되면서 나온 책들 중 총 1000만권 이상 1억권 이하가 판매된 리스트에는 모두 26권이 있는데 그중 일본어는 14개, 영어는 9개, 그리고 중국어 프랑스어 한글이 각기 하나씩이다. 여기에 들어 있는 한글 책은 수학의 정석인데 그동안 약 4000만권 정도 판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언가 허전한 느낌은 단지 필자만의 것은 아니리라 믿어진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다시 이야기하면 좋겠다.

김도연 < 포스텍 총장 dohyeonkim@postech.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