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언의 데스크 시각] '사면초가' 산업은행
산업은행이 사면초가에 빠졌다. 자회사인 대우조선해양이 ‘지난 2분기 해양플랜트 사업에서 생긴 부실을 반영해야 한다’며 느닷없이 3조원대의 영업손실을 낸 게 단초가 됐다. 2000년 말 출자전환을 통해 15년 동안 대우조선을 자회사로 거느렸기 때문에 관리 부실 책임론이 곧바로 불거졌다.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질책도 쏟아지고 있다.

감독기관인 금융위원회는 자회사 매각 등 대수술을 통한 산업은행의 역할 재정립에 나섰다. 감사원은 산업은행 등을 대상으로 부실기업 관리실태 조사에 착수했다. 국회는 오는 21일 정무위원회의 산업은행 국정감사를 통해 대우조선 부실의 책임 소재를 반드시 가리겠다고 벼르고 있다.

스스로 부른 위기

산업화 자금 공급을 위해 1954년 설립된 산업은행은 1960~1970년대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또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해 대우그룹 등의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주도하며 금융시스템을 지켜내는 역할을 했다.

그런 산업은행이 지금 맞고 있는 위기는 ‘자초’한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산업은행이 15% 이상 지분을 가진 비금융 자회사는 지난 6월 말 기준으로 118개사다. 벤처 육성책에 따라 투자한 중소·벤처기업이 100곳이지만 구조조정 과정에서 출자전환한 곳도 대우조선, STX조선해양, 동부제철, 한국GM 등 16개사다. 본업이 아닌 비금융 분야에서도 주요 그룹사 못지않은 외형을 갖췄다는 얘기다.

하지만 산업은행의 관리 능력은 커진 외형을 따라가지 못했다. 구조조정 전문성에 대한 의구심은 진작부터 불거졌다. 의사 결정의 속도감과 결단력이 떨어진다는 얘기가 줄을 이었다. 매년 국감 때면 산업은행 퇴직 임직원의 출자회사 낙하산 취업이 단골 메뉴로 도마 위에 올랐다.

대우조선엔 산업은행 부행장 출신이 부사장급 최고재무책임자(CFO)로 일했지만 대규모 부실 징후를 사전에 알아채지 못했다. 금융당국이 대우조선 부실 가능성을 물었지만 ‘이상 없다’고 보고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자회사 관리체계가 완전히 무너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구조조정, 시장에 넘겨라

산업은행은 이명박 정부 때 민영화를 위해 산은금융지주와 정책금융공사로 분리됐다가 창조경제 활성화를 위해 정책금융 지원을 강화한다는 이유로 올해 1월 다시 통합됐다. 하지만 역할과 기능은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정부 주도의 산업 육성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만큼 산업은행 무용론까지 나온다. 민간 금융 영역을 과도하게 침범하는 것도 문제로 꼽힌다. 금융위는 중견기업 지원이나 미래 산업 육성과 관련한 역할을 구상하고 있다.

시장에선 궁극적으로 구조조정 역할에서 손을 뗄 것을 주문한다. 구조조정을 담당할 수 있는 사모펀드가 이미 충분한 규모로 형성돼 있는 데다 산업은행의 구조조정 전문성이 시장에 비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그동안 숱하게 봐 왔듯이 산업은행 및 은행 중심의 구조조정은 시장논리가 아니라 정부와 정치권 압력에 휘둘릴 수 있다.

정부는 대우조선 부실로 건전성에 비상이 걸린 산업은행에 추가 출자 등 자본 확충 방안을 모색 중이다. 하지만 위기에 빠진 산업은행의 역할과 기능을 재정립하는 게 우선이다. 그러지 않으면 제2의 대우조선이 언제든 나올 수 있다.

김수언 금융부장 soo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