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상고법원, 아직 멀었다
대법원은 얼마 전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에 대한 항소심 판결이 잘못됐다’며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국정원 직원 이메일에 보관된 파일이 원 전 원장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로서 자격(증거능력)이 부족하다며 항소심 판단을 뒤집었다. 대법원은 오히려 1심의 법리를 채택했다.

대법원이 원 전 원장의 유무죄 판단을 유보함에 따라 파기환송심(고등법원)→대법원으로 이어지는 4심, 5심이 불가피해졌다.

상고법원이 새로 생기면 어떻게 될까. 현재 항소심을 맡고 있는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이 대거 상고법원 법관으로 임명돼 3심을 맡게 된다. 하지만 상고법원이 도입되더라도 “재판부의 실력을 믿지 못하겠다”며 당사자들이 대법원 판결(4심)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상고법원에 승복 못하면…

대법관 한 명이 사건을 한 해 3000건씩이나 처리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정상은 아니다. 상고법원 설치를 필사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사법부의 고충이 이해는 간다. 대법원은 법령을 통일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거나 사회적으로 파급효과가 큰 100건 안팎의 사건만 다루고 나머지 대부분 상고심 사건은 별도 법원(상고법원)에서 처리하겠다는 것이 상고법원 설치방안의 핵심이다.

외국의 입법 사례는 아일랜드가 유일하지만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찮다. 대한변호사협회는 “대법관 숫자를 늘리면 될 것 아니냐”고 딴지를 놓고 있다. 대법관과 달리 상고법원 법관은 국회 동의절차가 없어 3권분립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있다. 같은 법조인들끼리는 얘기가 통할 법도 한데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 평행선을 달린다. 왜일까.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실추됐기 때문이다.

사법부 불신의 시발점은 전관예우다. 대법관 숫자를 늘리자는 주장도 전관예우를 없애보자는 취지가 강하다. 대법관 숫자가 적으니 퇴임 후에 도장값 3000만원짜리 거액 수임료 논란이 일지 않느냐는 지적이다. 대법관을 30명 이상으로 늘리면 1인당 사건 수도 대폭 줄어들고 퇴임 후 몸값도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사법불신 먼저 해소해야

대법원이 정책법원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상고법원 설치는 불가피하다는 것이 사법부의 논리다. 하지만 대법원이 정책법원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선 선행 조건이 있다. 대법원을 구성하는 14명의 대법관이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법부는 여기서도 함량 미달이다. ‘서울대 법대, 판사, 남성’ 일색이다. 14명 대법관 중 서울대 출신이 12명(고려대 한양대 각 1명), 판사 출신이 13명(검사 출신 1명)이다. 남성과 여성 비율은 12 대 2다. 오는 9월 퇴임 예정인 민일영 대법관 후임을 추천받은 결과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후보자 27명 가운데 22명이 현직 판사, 5명이 변호사였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전체 15명 가운데 법관 출신이 6명에 불과하다.

상고법원 설치를 둘러싼 찬반양론은 어느 한쪽의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이런 경우 제도 그 자체보다는 제도를 운영하는 기관과 사람을 볼 수밖에 없다. 사법부가 불신의 뿌리를 뽑겠다는 진정성 있는 자세를 보여줘야 할 때다.

김병일 지식사회부 부장대우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