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곡우 단비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 푸르른 보리밭 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에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랭이 타오르것다.’

60년 전 현대문학에 처음 발표된 이수복 시 ‘봄비’ 다. 봄의 마지막 절기 곡우(穀雨·4월20일)에 내리는 비는 백곡을 기름지게 하는 단비다. 예부터 모든 곡식이 잠을 깨는 곡우에 비가 내려야 논에 못자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못자리가 잘 돼야 가을에 수확이 많을 것은 당연하다.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 자가 마른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땅에서 만물이 피어나는 것처럼 물에서도 생기가 넘쳐난다. ‘강나루 긴 언덕’ 옆에서 민물고깃배와 낚시꾼들은 신바람이 난다. 서해 칠산 앞바다와 연평도 일대에는 알배기 참조기가 떼를 지어 몰려온다. 이 무렵 산란 직전에 잡은 조기를 ‘곡우사리 조기’ ‘오사리 조기’라 해서 최상품으로 친다. 이것을 해풍에 말린 게 곧 임금님 수라상에 올린다는 ‘곡우사리 굴비’ ‘오가재비 굴비’다.

이때쯤에는 나무에도 수액(樹液)이 넘쳐난다. 고로쇠나무가 많은 지리산에서는 곡우 때 약수제까지 지낸다. 자작나무·박달나무·다래나무 수액도 인기다. 위장병 치료에다 남자에게 좋다는 고로쇠물은 경칩부터 나지만 이뇨작용에다 여자에게 더 좋다는 거자수액(자작나무)은 곡우 때가 절정이다.

곡우 전에 딴 우전차(雨前茶)도 마찬가지다. 맨 먼저 딴 찻잎이라 해서 첫물차라고도 하는데, 맛이 좋고 향이 은은하며 생산량은 적어 값이 비싸다. 곡우가 지나면 순이 잎으로 변해 맛이 줄어들기에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다성(茶聖) 초의선사는 ‘(중국 다서(茶書)에) 곡우 5일 전이 가장 좋다고 돼 있으나 우리나라에서 곡우 전후는 너무 빠르고 입하 전후가 적당하다’고 했다. 절기와 생육이 중국과 다른 것을 일깨우는 말이다.

곡우에는 산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청명에 피기 시작한 들꽃이 산으로 번지는 모양새다. 일렁이는 강물 사이로 버들가지 푸르고 온갖 꽃 비단 장막에 푸른 숲이 아롱거리는 절기. 때맞춰 곡우 앞두고 내리는 단비에 온 땅이 촉촉하다. 이 비 아니었으면 들꽃과 산꽃 사이에 수천수만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꽃잎 뒤태를 슬며시 들추며 딴청 피우는 빗소리 때문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는 것도 모를 뻔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