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장진호 전투
1950년 겨울, 얼어붙은 압록강 위로 중공군 30만여명이 몰려왔다. 18만여명은 서부전선, 12만여명은 동부전선에 투입됐다.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인해전술이 시작됐다. 전황은 급변했다. 서부전선이 무너지자 유엔군에 철수령이 내려졌다. 곧 이어 동부전선이 와해됐다. 개마고원 장진호까지 진격한 미 해병 1사단 병력 1만여명은 중공군에 완전 포위됐다.

해병 1사단은 2차대전에서도 활약한 최정예부대였다. 별명은 사냥개 ‘도베르만’이었다. 지휘관 스미스 소장도 유럽과 태평양 전장을 누빈 백전용사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매복과 기습, 야간·새벽 공격에 혼이 나갈 정도였다. 전멸 위기였다. 도쿄의 사령부도 ‘잃어버린 사단’으로 포기하는 분위기였다.

적은 중공군뿐만이 아니었다. 해발 1000m의 험준한 산악과 영하 35도의 혹한은 더 치명적이었다. 중기관총에 부동액을 채워야 했고 경기관총은 주기적으로 총신을 달궈야 했다. 공중 보급품이 언 땅에 부딪혀 깨지는 바람에 탄약도 25% 정도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차가운 전투식량을 먹고 설사에 시달렸다. 기습 때문에 침낭 속에서 잘 때도 지퍼를 닫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동상이었다. 전투 중 땀이 나면 발과 발싸개 사이에 얇은 얼음막이 생겨 금방 탈이 났다. 부상자용 수혈관이나 모르핀도 얼었다. 붕대를 갈기 위해 장갑을 벗으면 손이 바로 얼어 치료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17일간 혈투를 벌이며 중공군을 막아냈다. 그리고는 극적으로 포위를 뚫고 흥남까지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영화 ‘국제시장’에도 나오지만, 유엔군 10만여명과 피란민 10만여명의 목숨을 구한 흥남 철수는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차대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2대 동계(冬季) 전투로 꼽히는 이 비극의 현장 장진(長津)은 영어로 초신(Chosin)이라 불린다. 당시 한국어 지도가 없어 일본어 지도를 사용한 미군이 일본식으로 읽은 결과다. 생존자 모임 초신 퓨(Chosin Few)는 ‘선택 받은 소수(Chosen Few)’를 패러디한 것이다.

당시 참전했던 스티븐 옴스테드 해병대 예비역 중장 등 노병들이 미국에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세우는 모양이다. 묘비 수준의 기존 것과 달리 일반인도 참배할 규모로 만들겠다고 한다. 장진호 전투를 다룬 책은 미국에서만 세 권이나 나왔다. 국내에선 소설 한 권이 전부다. 스토리 부재라는 한국 문화계로서는 무궁무진한 장엄미(美)의 원천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