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국 가이드라인 없어

5천만원 넘어 자녀에 분산
동창회 총무 회비 통장 등
'예외 인정' 기준 불분명
[강화되는 금융실명法] "가족 명의 예금분산 무조건 안돼?"…차명거래 금지 앞두고 혼란

중학생 아들 명의로 지난해 3000만원을 거래은행의 3년 만기 예금에 넣어 둔 자영업자 김희광 씨(45)는 요즘 고민에 빠졌다. 최근 은행을 찾았다가 직원으로부터 아들에게 돈을 준다는 증여 신고를 하고 증여세를 내거나 만기 이자를 포기하고 돈을 찾아 김씨 명의로 재가입하는 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다.

해당 은행에 예금자 보호한도(5000만원)가 넘는 돈이 자신의 이름으로 있어 아들 명의로 해둔 게 꼬투리가 됐다. 차명거래를 원칙적으로 금지한 금융실명거래법 개정안이 다음달 29일 시행되면 김씨의 행위가 탈세 목적의 차명거래에 해당돼 형사처벌까지 받을 수 있다는 게 은행의 설명이었다. 김씨는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지만 은행 측은 아직 ‘불법 차명거래’의 범위가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았다며 일단 기다려볼 것을 권유했다.

◆‘차명거래 금지 예외’ 기준 모호

개정된 금융실명거래법 시행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지만 어디까지를 ‘불법’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관련 당국의 지침이 없어 금융회사 일선 창구에서 큰 혼란이 일고 있다. 은행 담당자들은 13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 모여 불법 차명거래의 범위를 정해달라고 금융당국에 서면 요청하는 방안 등을 논의했다.

예금자 보호한도까지만 예금을 하고 남는 돈은 자녀 등 가족 명의로 가입하는 것이 불법 목적의 차명거래인지 가려달라는 요구도 그중 하나다. 2011년 ‘저축은행 사태’ 당시 5000만원 초과 예금을 떼인 금융소비자들이 많았고 정부도 분산을 장려한 마당에 자녀 명의를 이용한 게 죄가 될 수 있느냐는 얘기다.

정부는 지난 5월28일 개정법안을 공포할 당시 ‘불법재산 은닉, 자금세탁, 그 밖의 탈법행위를 목적으로 한 차명거래를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9월15일 입법예고된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개정안에서 ‘그 밖의 탈법행위’의 구체적인 내용을 적시하지 않아 혼선을 자초했다.

절세형 상품들도 비슷한 이유로 혼란을 낳고 있다. 세금우대종합저축의 경우 1000만원 한도로 가입할 수 있다. 때문에 세금 혜택을 더 받기 위해 1000만원이 넘는 돈은 가족 등 타인 명의로 가입하는 사람이 많다. 이 경우도 차명거래지만 ‘불법’으로 봐야 하는지를 두고 혼선이 일고 있다.

일각에서는 불법 목적은 아니지만 어쨌든 예금을 분산시킴으로써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자에서 빠졌다면 단순히 안전성이나 법이 정한 범위 내에서 세금 혜택을 받기 위한 ‘선의의 차명거래’로 볼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동창회·종친회 통장은 OK?

동창회 총무가 회원 회비를 관리하는 경우 종친회 통장 등은 불법적인 목적이 없다고 봐야 한다는 데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또 가족 명의로 계좌를 이용한 차명거래라도 세금에 변화가 없다면 탈법 행위가 아니라는 의견이 많다.

다만 이런 경우에 대한 당국의 유권해석도 아직 없다는 점이 문제다. 은행권은 법 시행 전까지는 가이드라인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때문에 조금이라도 애매하면 판단을 보류할 수밖에 없어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애매한 상황이라면 서둘러 명의 변경 등 절차를 진행하는 게 좋다고 주문하고 있다. 다음달 29일 법이 시행되면 과세당국은 계좌 명의자에게 재산 소유권이 있는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특히 가족이 아닌 사람의 명의를 이용했다면 자칫 돈을 떼일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때도 명의 변경 시 그동안 차명 계좌를 이용했다는 점이 사실상 인정되기 때문에 이에 따른 추가 세금을 납부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김일규 기자 black041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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