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최경환 풋'의 함정
앨런 그린스펀이 중앙은행(Fed) 의장으로 재직한 18여년(1987년 8월~2006년 1월)을 미국에선 ‘대완화기(Great Moderation)’라 부른다. 1930년대의 ‘대공황기(Great Depression)’, 19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기(Great Stagflation)’ 등으로 이어진 혼돈기를 마감했다는 성취감이 묻어나는 평가다.

대완화기에 미국의 성장률은 2~5%로 수렴되며 극심했던 경기변동이 종식됐다. 10%를 넘나들던 물가와 실업률도 동시에 5% 밑으로 떨어졌다. 물가와 고용을 다 잡을 수는 없다던 경제이론(필립스곡선)을 깬 것이다.

경제 리더십 등장에 ‘열광’

당시 그린스펀은 “미국 경제가 새로운 경지를 열고 있으며, 경제학은 다시 쓰여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취임 2개월여 만에 맞은 블랙먼데이, 아시아 금융위기, 닷컴 버블 붕괴, 9·11 테러 등 끊임없는 시련 속에서 일궈낸 성과였다.

특히 거대 헤지펀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가 러시아 모라토리엄의 후폭풍으로 1조5000억달러의 부실을 떠안고 파산한 패닉 국면에서 그는 진가를 입증했다. 과감하게 기준 금리를 세 달 연속 인하하고, 노골적 개입으로 금융사들의 구제금융을 이끌어 내며 사태를 조기 진압했다.

그렇게 ‘최종 대부자’의 존재감이 확인되자 사람들은 ‘그린스펀 풋’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미리 정해둔 고가에 자산을 팔 수 있는 권리인 ‘풋 옵션’처럼 그린스펀이 언제나 바닥을 받쳐줄 것이란 신뢰가 자리 잡았다.

출범 한 달을 막 넘긴 2기 경제팀을 두고도 벌써부터 ‘최경환 풋’이라는 말이 회자된다. ‘지도에 없는 길’을 찾아서라도 경제를 회복시키겠다는 최경환 부총리의 행보에서 갈구해 오던 리더십을 만났다는 기대가 충만하다. 취임 일성으로 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완화를 들고 나온 데서 시장은 분명한 메시지를 읽고 있다. 적잖은 금기였던 가계부채 증가와 부동산 거품을 감수하고라도 대전환을 시도하겠다는 승부사의 호흡을 감지한 것이다.

‘풋’ 혜택에 따른 비용 따져야

일각에선 확장·완화 중심의 정책기조에 대해 ‘짝퉁 아베노믹스’나 ‘철 지난 그린스펀의 길’ 아니냐는 우려를 내놓는다. 규제 완화를 말하면서 ‘완장’의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모순된 행보를 ‘잡탕식’이라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굳건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최경환 풋’을 밀어내기는 역부족이다. 불과 한 달 만에 되찾은 시장의 활기가 지표로 입증되고 있어서다.

이쯤에서 생각해볼 건 ‘최경환 풋’의 비용이다. 세상에 공짜 점심이 없듯이 ‘최경환 풋’을 누리기 위해선 대가를 줘야 한다. ‘그린스펀 풋’에 취했던 미국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격랑을 불러온 것도 그런 이치다. 옵션의 구입가격을 최소화하고, 궁극적으로는 제로로 수렴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현실에서는 반대로 ‘최경환 풋’의 가격이 치솟고 있다. 재정 금융 세제 규제 등 가용한 실탄이 총동원되면서 베팅액이 커졌기 때문이다. 재정만큼은 성역으로 두는 신중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유사시 풀린 돈은 거둬들이면 되지만 나라 곳간은 한 번 거덜 나면 회복불능이다. ‘반신(半神)’ 그린스펀조차 실패한 데서 보듯 시장을 설계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과욕이다. ‘최경환 풋’은 안전판인 동시에 뇌관이기도 하다.

백광엽 금융부 차장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