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롯데의 새 DNA를 기대한다
공무원을 하다 몇 년 전 삼성그룹으로 옮긴 지인 A씨는 법인카드 얘기만 나오면 떠오르는 일이 있다. 이직 초기 골프 접대를 다니다 골프장에서 파는 과일과 거의 같은 수준의 과일을 집 부근 대형마트에서 반값 정도면 살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회삿돈을 아끼겠다는 ‘충정’에서 두 번 정도 사가지고 가 동반자들에게 선물로 줬다가 감사실의 호출을 받았다. A씨는 ‘떳떳하게’ 경위를 설명했지만 감사실 직원은 눈을 부라리며 “앞으로 골프장에서 과일값이 얼마를 하던 무조건 골프장에서만 사라”며 호통을 쳤다. 선의라고 해서 예외를 두기 시작하면 나중엔 통제불능의 사고가 터질 수 있다는 경고와 함께….

대외 이미지 관리에 소홀

기업들에는 저마다의 조직 문화가 있다. 창업주의 경영 이념이 반영된 기업 문화는 세대를 이어가며 조직의 ‘DNA’가 된다. 삼성의 5대 경영원칙의 제1항과 2항은 ‘법과 윤리 준수’ ‘깨끗한 조직문화’다. 그 밑바탕에는 이병철 창업회장의 ‘신상필벌론’이 자리잡고 있다. 신상(信賞)은 인사로 보상해 주는 것이고, 비위 직원에게는 ‘필벌’(必罰)이 가해지는데 그 대표적인 수단이 감사(監査)다. 국내 기업 중 사내 감사기능이 가장 엄격한 삼성에는 직원들이 감사를 회사 생활의 ‘상수(常數)’로 생각하는 DNA가 형성돼 있다.

재계 5위로 성장한 롯데그룹의 DNA는 무척 현실적이다. ‘거화취실(去華就實)’. 화려함을 버리고 실속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신격호 총괄회장의 모교인 와세다대의 교훈(校訓)이자 신 총괄회장이 평생을 붙들고 온 경영 화두다. 롯데에서는 전문 경영인이 언론에 나오지 않는 것을 불문율처럼 여긴다. 이 역시 거화취실론에 따른 것이다. “언론에서 회사 자랑하는 것은 오히려 경쟁사를 자극시켜 손해 보는 일”이라는 인식이 심어져 있다. 신문이나 TV 등의 광고에서도 제품·서비스 광고 외에 기업 이미지 광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위기를 DNA 바꾸는 기회로

거화취실은 롯데의 성장 이념이었지만, 요즘에는 한계도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본업 충실’만 너무 강조한 나머지 외부에 비치는 기업 이미지 관리에는 소홀했다는 점에서다.

롯데홈쇼핑 비리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롯데 외부의 많은 사람들은 롯데는 신세계나 현대백화점 등 경쟁 유통업체에 비해 봉급이 낮아 구조적으로 비리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과거 롯데의 봉급은 신세계 등의 70% 수준이던 때가 있었으나 지금은 동일한 수준으로 개선됐다. 문제는 롯데의 봉급이 낮아 협력업체에 대한 횡포로 부족한 부분을 벌충할 것이란 인식이 여전히 팽배해 있다는 점이다.

롯데는 홈쇼핑 비리 사건 이후 주력 계열사인 롯데백화점을 중심으로 ‘클린 경영’을 위한 적잖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형성돼온 기업의 DNA와 외부 이미지를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그 몫은 신동빈 회장이 맡을 수밖에 없다. 신 회장은 두 가지 의미에서 CEO가 돼야 한다. 최고경영자면서 동시에 최고윤리경영자(Chief Ethics Officer)여야 한다. 롯데홈쇼핑 사건은 오히려 좋은 전기가 될 수 있다. 윤리경영의 모범으로 꼽히는 독일 지멘스도 주가가 반토막나는 납품 스캔들을 겪은 뒤 환골탈태했다.

윤성민 생활경제부장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