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은 노비(奴婢)가 있어야 제대로 된 양반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양반의 나라인 조선은 노비의 나라이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의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는 노비제의 전성기였다. 전체 인구의 30~40%가 노비였다고 추측되는데 노비제가 발달한 남부지방은 더 높았을 것이다. “노비가 십중 팔구”라는 말은 과장이지만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노비가 절반”이라는 성현(成俔)의 말은 크게 틀린 것이 아니었다. 17세기의 호적을 봐도 1609년 울산은 47%가 노비였으며, 1606년의 단성은 무려 64%가 노비였다.

조선은 양반의 나라이자 노비의 나라

노비는 양반이 가장 많이 소유하였는데 천명이 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태종이 노비 소유의 상한선을 정하려고 하였을 때 노(奴·남자종)만 계산하여 왕실의 종친과 부마는 150명(1품)이었고, 문무관은 130명(2품 이상)이었다. 비(婢·여자종)와 처가에서 상속받은 노비는 빠져 있으므로 500~600명은 보유할 수 있었음에도 반대가 심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왕실과 양반이 소유한 노비 숫자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고위 관직을 지낸 양반들이 많은 숫자의 노비를 소유하였다.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이맹현은 노비 757명을 자손에게 상속하였는데(1494년), 현재까지 전하는 상속문서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다. 퇴계 이황도 5명의 자녀에게 모두 367명의 노비를 상속하였다(1586년). 노비는 이렇게 토지와 마찬가지로 상속되고 매매되는 재산이었다.

왜 노비제가 발달하게 되었을까. 노비 시장을 가정하고 노비의 수요와 공급을 생각해보자. 먼저 수요부터. 노비는 양반의 수족으로서 집안일부터 농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노동을 대신하였다. 경제적으로는 넓은 토지를 소유한 양반의 농장경영을 위해 노동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특히 조선 전기에는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하천 주변이 새롭게 개발되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노비에게는 노동자와 같이 임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지만 노비를 사는 데 비용이 들며, 의식주을 제공하여 부양해야 하고, 일을 제대로 하는지 감독도 해야 한다. 일을 잘한다고 임금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고대 로마에서와 같이 주인 마음에 들면 해방시켜주는 일도 없었기 때문에 감독에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주인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도망 노비가 아니었을까. 세조를 왕으로 만드는 데 공을 세운 한명회(1415~1487)에 따르면 도망 중인 노비가 100만명이나 되었다.

수요와 공급 모두 많아 노비제 발달

이렇게 노비 소유에는 비용이 들기 때문에 다른 대안보다 유리해야 노비를 수요할 것이다. 노동자를 고용하던가 농민에게 땅을 빌려주고 지대(소작료)를 받는 것이 이익이 더 크다면 노비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게 된다. 노동자와 소작인은 부양할 필요가 없으며, 특히 소작인에게는 감독비용도 적게 든다. 수확이 늘어나면 소작인에게도 이익이 돌아가기 때문에 스스로 일을 열심히 할 인센티브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점이 있음에도 15~17세기에 노비제가 번성하였다는 것은 노동자를 구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을 만큼 노동시장이 발달하지 못하였고, 소작을 주려고 해도 가족노동을 이용한 농업경영이 안정적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노비에 대한 수요가 많다고 하더라도 노비가 공급되지 않으면 노비제가 발달할 수 없다. 형벌로 노비로 만드는 경우 외에도 조선 전기에는 노비의 공급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많았다.

조선왕조의 개창으로 고려 왕실과 불교사원에 속해 있던 노비들이 관청의 공노비나 공신들의 사노비로 분배되었다. 또한 국가에 대한 공물이나 군역으로 인한 부담을 견디지 못해 많은 양인이 몰락하였다. 특히 세조 7년(1461)의 호구제도 개혁으로 20여만호가 130만호 정도로 급증하였는데 이러한 급진적인 호구 개혁이 노비를 양산하였다.

이와 같이 노비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노비제가 발달하게 되었던 것인데, 노비에는 성격이 매우 다른 두 종류가 있었다. 주인집이나 근처에서 살면서 가사나 농사에 사역되는 노비와 주인집에서 멀리 떨어져 살면서 공물을 납부하는 노비가 있었다. 각기 솔거(率居)노비, 외거(外居)노비라고 하여 어디에 사는가를 기준으로 나누는 것이 보통이지만, 최근에는 주인에게 무엇을 제공하는가에 따라서 노동을 직접 제공하는 ‘입역(立役)노비’와 공물을 납부하는 ‘납공(納貢)노비’로 구분하기도 한다.

보통 노비 하면 머리에 금방 떠오르는 것이 입역노비지만, 조선시대에는 상당수의 노비가 납공노비였다. 서울에 살면서 권력을 가진 집안에서 납공노비를 많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권력이 없이 멀리 떨어져 있는 노비를 관리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공노비의 경우에 1년에 노(남자종)는 포(삼베) 2필, 비(여자종)는 포 1.5필을 납부하였는데 개인이 소유한 납공노비도 큰 차이가 없었다.

18세기 수요 감소 노비가격 폭락

김홍도의 풍속화(벼타작도). 벼를 수확해 타작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들 중에는 분명히 노비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노비에게 비천한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가 많았지만 옷이나 머리모양으로 일반 양인과 표나게 구별하지는 않았다.

김홍도의 풍속화(벼타작도). 벼를 수확해 타작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들 중에는 분명히 노비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노비에게 비천한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가 많았지만 옷이나 머리모양으로 일반 양인과 표나게 구별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재산으로서 매매와 상속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입역노비와 납공노비 모두 노예였고 당연히 가격이 매겨졌다. 노비의 공정가격은 『경국대전』(1485년)에 저화(楮貨·종이 돈) 4000장(쌀 20석, 면포 40필)이었는데 당시 말 한 마리 가격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속대전』(續大典, 1746년)에서도 공정가격은 100냥(쌀 20~30석)이었으므로 큰 변화가 없었지만, 18세기에 노비가격은 폭락하여 공정가격의 1/10에 불과한 10냥 전후에 불과하게 되었다. 수요 측면에서 17세기 중반 이후부터 노비에게도 군역을 부과하였고 도망노비를 추적하는 것에 대해서 제한을 가하여 주인의 이익이 크게 줄어들었다. 특히 소작을 줄 농민경영이 안정되어 양반들이 노비를 직접 부리지 않아도 토지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노비 수요가 감소한 가장 큰 이유였다.

조씨 부인이 열 살인 딸 옥이를 25냥에 노비로 파는 노비문서. 이렇게 양인이 자신이나 가족을 팔아서 노비가 된 자를 ‘자매노비’라고 하였다.

조씨 부인이 열 살인 딸 옥이를 25냥에 노비로 파는 노비문서. 이렇게 양인이 자신이나 가족을 팔아서 노비가 된 자를 ‘자매노비’라고 하였다.

한편 1730년부터 어머니가 양인인 경우에 어머니 쪽 신분을 따르도록 노비법이 완화되어 노비의 공급이 줄어들었지만, 양인들이 자신과 가족을 노비로 파는 ‘자매’(自賣)노비가 생겨났다(그림 참조). 본래 양인이 자신을 노비로 파는 것은 법에 금지되어 있었지만, 18세기 후반부터는 세습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합법화되었다. 지주제(소작제)의 발달로 노비 수요, 특히 농사에 투입될 노(奴)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었지만, 빈곤으로 인해 자신과 처자식을 파는 농민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18세기 이후 인구증가로 인구 압력이 높아져 생존의 위기에 내몰리는 농민들이 증가하였지만, 이들을 고용할 도시의 노동시장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16) 조선시대 노비의 수요와 공급

이런 조건에서 노비의 수요가 감소함에 따라서 노비 가격은 하락하였으며 18세기 이후 노비제도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점차 장기고용 노동자라고 할 수 있는 고공(雇工·머슴)이 노비를 대체하기 시작하였고 수백 명의 노비를 소유하던 양반들도 대개 10명 정도를 소유하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다. 호적에서 차지하는 노비의 비중도 감소하여 대구의 경우 1690년 43.1%였던 노비 수가 1789년에는 15.9%로 줄어들었다(15회 참조). 그러나 장구한 역사를 가진 노비제도가 쉽게 폐지될 수는 없었다. 특히 가사노동에 사역되는 여자 종(비) 수요는 계속되었고 남자 종(노)보다 가격도 비쌌다.

김재호 < 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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