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제조·직매형 의류(SPA)의 한국 상륙 이후 소비자들이 ‘아주 저렴한’ SPA나 ‘아주 고급스러운’ 명품에만 지갑을 여는 현상이 강해지고 있다. 사진은 SPA 브랜드 ‘스파오’의 서울 명동 매장. 한경DB
해외 제조·직매형 의류(SPA)의 한국 상륙 이후 소비자들이 ‘아주 저렴한’ SPA나 ‘아주 고급스러운’ 명품에만 지갑을 여는 현상이 강해지고 있다. 사진은 SPA 브랜드 ‘스파오’의 서울 명동 매장. 한경DB
통신업체에 다니는 송하나 대리(29)는 쇼핑을 하는 원칙이 있다. 원피스나 재킷 등 일상에서 입는 옷은 ‘자라’나 ‘H&M’ 등 패스트 패션이라 불리는 해외 제조·직매형 의류(SPA) 매장에서 산다. 대신 가방이나 구두는 명품 브랜드를 골라 산다. “옷값 지출을 줄여 가방이나 구두처럼 오래 사용하는 물품을 구매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소비에 ‘중간’은 없다

[한국 패션산업 'SPA 쇼크'] "팔리는 건 SPA 아니면 명품"…'잘 나가던' 후부·콕스 등 잇단 퇴출
SPA의 한국 상륙 이후 가장 큰 변화는 소비자의 의류 구매 패턴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박성경 이랜드그룹 부회장은 “요즘 소비자는 명품으로 포인트를 주고 패션은 SPA를 입는다”고 말했다. 철저히 싼 제품을 사든지, 아니면 아주 고급스러운 브랜드를 구매하든지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SPA와 명품으로 소비자가 쏠리면서 ‘중간지대’인 중가(中價) 의류 시장은 무너지고 있다. 패션 컨설팅업체 MPI가 국내 패션시장의 가격대별 판매 비중을 분석한 결과 중가 상품 비중은 2005년 38%에서 2012년 24%로 급감했다. 대신 고가·중고가 상품이 29%에서 38%로, 저가·중저가는 33%에서 38%로 늘었다. 송 대리는 “백화점 옷은 비싸고 인터넷이나 전통시장 의류는 신뢰도가 떨어지는데 SPA에서 옷을 사면 이런 단점이 동시에 해결된다”고 말했다. 품질 대비 가격을 꼼꼼히 따져 만족감이 큰 제품을 구매하는 ‘가치소비’ 흐름에 맞는다는 이야기다.

◆위기의 중견업체

SPA로 소비자는 웃지만 토종 패션업체들은 울상이다. 연간 35조원 규모인 국내 패션시장은 2~3년 전부터 성장률이 연 1~2% 선으로 뚝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유니클로, 자라, H&M이 급성장했다는 것은 그만큼 국내 업체가 고전하고 있다는 의미다.

사실 SPA와 상품이 겹치는 캐주얼과 여성복은 거의 ‘멘붕’ 상태다. 지난해 고별 세일을 끝으로 사라진 제일모직 ‘후부’의 경우 끈질긴 자구 노력에도 불구하고 SPA에 무릎을 꿇은 사례다. 1999년 선보인 후부는 힙합 열풍이 절정에 달한 2001년에는 매출 400억원대의 인기 브랜드였다. 힙합 인기가 주춤해지자 제일모직은 2004년부터 2012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영 스트리트 캐주얼’ ‘스포츠 캐주얼’ ‘어번 스트리트 캐주얼’ 등으로 브랜드 콘셉트를 전면 개편했다. 브랜드의 저력을 되살리기 위해 연구개발(R&D) 역량을 쏟아부은 것이다. 하지만 “SPA로 빠져 나가는 젊은층을 잡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판단 아래 지난해 전격적으로 사업 중단을 결정했다.

한 중견 의류업체의 임원은 “2010년쯤부터 캐주얼이 안 팔리기 시작하더니 1~2년 뒤엔 여성복 매출도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매출이 줄다 보니 투자 여력도 없어져 2~3년간 신규 브랜드 출시는 엄두도 못냈지만 같은 기간 해외 SPA는 급성장했다”고 말했다.

◆대기업조차 ‘SPA 쇼크’

한국패션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사업을 중단한 국내 브랜드는 38개에 달했다. ‘윈디클럽’ ‘까스텔바작’ ‘페이지플린’ ‘쉐인진’ 등 캐주얼 브랜드부터 ‘헤리스톤’ ‘옴브루노’ 등 남성복, ‘가나스포르띠바’ ‘데레쿠니’ 등 여성복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이다. ‘리틀브랜’ ‘톰과제리’ 등 아동복과 ‘KYJ골프’ ‘잔디로골프’ ‘앙드레김골프’ 등 토종 골프웨어도 운영을 멈췄다. 굿컴퍼니, 가나레포츠, 동의인터내셔날 등 중견업체는 부도로 문을 닫았다.

대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LG패션은 매출 감소로 창고에 쌓인 재고를 줄이느라 안간힘을 쓰며 한 해를 보냈다. 이랜드, 신세계인터내셔날, LS네트웍스 등도 저수익 브랜드를 줄줄이 정리했다. 중견 여성복 분야의 강자인 패션그룹형지와 세정그룹은 쇼핑몰 인수 등을 통해 자체 유통망 강화에 나섰다. 제일모직 패션부문은 삼성에버랜드로 자리를 옮겨 새출발했다. 최현호 MPI 대표는 “해외 패션 브랜드의 한국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토종 브랜드가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며 “SPA처럼 시장을 적극적으로 창출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현우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