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지방경찰청장실에서 만난 이금형 청장은 “자식들의 안전을 돌보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부산의 민생치안을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부산지방경찰청 제공
부산지방경찰청장실에서 만난 이금형 청장은 “자식들의 안전을 돌보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부산의 민생치안을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부산지방경찰청 제공
1977년 충북 청주 대성여상을 졸업한 한 소녀가 있었다.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생계를 위해 잠시 꿈을 접고 경찰이 됐다. 그 후 36년의 세월이 흘러 지난 12월10일, 국내 첫 여성 치안정감에 올랐다. 치안정감은 경찰 계급 체계에서 치안총감(경찰청장) 바로 아래 직급으로 5명(경찰청 차장, 서울·경기·부산경찰청장, 경찰대학장)밖에 없다.

경찰 내 ‘유리천장’을 잇따라 깨고 올라간 이금형 부산지방경찰청장을 지난 23일 부산지방경찰청에서 만났다. 첫 인상은 선해 보이는 ‘옆집 아주머니’였다. 하지만 이날 오전 11시부터 점심식사 뒤까지 이어진 두 시간 남짓의 인터뷰는 그가 왜 이 자리에 앉아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시게 했다.

▷경찰생활이 올해로 36년째입니다.

“사실 경찰을 오래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5~6년 정도 하고 나서 결혼하면 미술학원이나 피아노학원을 차릴 생각이었지요. 제가 그림도 좀 그리고 피아노도 좀 쳤거든요. 그런데 경위 계급장을 달면서부터 생각이 바뀌었어요. 간부가 되자 하고 싶은 일이 많아지더군요. 경위가 할 수 있는 일이 한계가 있다 보니 ‘경감이 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그때부터 낮에는 경찰, 밤에는 학생이 됐지요. 계급이 높아질수록 그런 생각은 더 커졌고요.”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던데요.
“경장 때 몽타주 요원으로 발탁돼 서울로 올라오면서 업무 능력은 어느 정도 인정받기 시작했지만 고졸·여성·순경 출신이라는 한계가 느껴졌어요. 부족한 학력을 메우기 위해 1997년 방송통신대 법학과를 졸업했고 2002년 동국대 행정학 석사, 2008년에는 동국대에서 경찰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승진은 시험으로, 업무는 프로가 되자’라는 생각을 비교적 잘 실천한 셈이지요.”

승진 과정이 궁금했다. 잠시 짬을 내 부산지방경찰청 인사계에 요청해 이 청장의 승진 기록을 살펴봤다. “특진은 몇 번이나 했을까” 하는 생각으로 기록을 들여다보니 ‘특진’이란 단어가 없다. 오로지 시험 승진. 게다가 재수 한 번 없이 모두 단번에 합격했다. 1977년 순경 입문, 1982년 경장, 1986년 경사, 1990년 경위, 1993년 경감, 1998년 경정 승진. 이후 5년 만에 2003년 총경 계급장을 달았고 2009년 경무관, 2011년 치안감을 거쳐 치안정감에 올랐다.

▷공부는 어떻게 한 건가요.

“‘이금형식 녹음기 학습법’이라고 있어요. 제가 이제껏 망가뜨린 녹음기가 모두 5대예요. 작은 사이즈의 워크맨 3개, 전축 크기의 녹음기 2대죠. 방송대 학습자료가 당시에는 대부분 녹음테이프였거든요. 승진 시험 때는 매일 틀어놨어요. 음식을 만들거나 다리미질을 할 때, 또 머리를 말리면서도 녹음을 들었죠. 형법을 공부할 때는 ‘강간죄가 성립하려면 삽입이 있어야 하고…’ 하는 식의 듣기 거북한 내용의 녹음테이프를 아침 밥상에서부터 들어야 했던 남편이 ‘그 무슨 공부법이 그러냐’고 ‘야지’(빈정거린다는 뜻의 일본어)를 놓았는데, 이제는 ‘이금형식 공부법’을 인정해줘요. 의사 국가고시를 눈앞에 둔 막내딸도 요즘 녹음기로 공부한다더군요.”

▷20년 이상을 그렇게 공부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20년 이상을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계획했다면 불가능했겠지요.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남들이 볼 때 지금의 이금형이 화려하고 엄청난 자리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하루하루가 1년이 되고, 그게 36년이나 된 것뿐입니다. 1만3000여개의 날들이 모여서 덩어리가 된 것만 보다 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특별한 유전자를 타고난 것 아닌가요.

“사실 제 어머니가 좀 대단하신 분이에요. 올해 연세가 85세인데, 지금껏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평생을 증조부모, 시부모님에 남편인 제 아버지 병수발을 하셨으니까요. 그런 사실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충북도로부터 효부상을 받기도 했어요. 그 불굴의 인내심으로 살아오신 분이 제게는 어떤 요구도 하지 않으시고 시댁에 잘하도록 배려해 주셨고요. 그런 유전자가 제게도 일부 심어진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행복한 부부’로 한경에 소개도 됐었죠.

“남편은 1981년 제가 충북도경 상황실에 근무할 당시 전투경찰이었어요. 2년 연애하고 1983년 결혼했지요. 결혼 후에 신세계 그룹에 입사한 남편은 제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니까 신세계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어준다고 했는데 지금은 별 말이 없네요. (웃음) 2004년이던가요. 한국경제신문에 우리 부부 이야기가 보도된 적이 있어요. 남편이 퇴직 후에 잘해주겠다는 내용이었는데, 지켜봐야죠. (웃음) 남편은 2년 전에 이마트 부사장직을 끝으로 퇴직했습니다. 세 딸은 시어머니의 도움으로 잘 커줘서 다들 자리를 잡았고요.”

▷‘불도저 청장’ 취임으로 부산 경찰이 떨고 있다는 소리도 들립니다.

“제가 리더로서 덜 성숙한 탓이겠지요. 하지만 해명을 좀 하자면 그동안 제가 부임한 서울 마포경찰서나 광주경찰청 같은 곳은 사각지대였던 곳입니다. 일을 만드는 게 아니라 심각한 현안들이 있었습니다. 선례가 없는 사건들을 맡다 보니 일선 직원들이 다소 힘들었던 것이죠. 부산은 다릅니다. 부산경찰은 3년 연속 치안평가 1위를 할 정도로 일을 잘하고 있어요. 현재로선 손댈 부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 10일 취임식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범죄 발생 후 진압보다 예방에 중점을 두는 이른바 ‘빅 마더(큰어머니) 리더십’으로 부산을 ‘세계 제일의 안전도시’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이 청장. 경찰 식구들과 시민들에게 한걸음 다가서는 것으로 청장 업무를 시작했다. 당장 내년 1월부터 부산청 소속 경찰들의 생일파티를 열어주고 2주에 한 번씩은 일선 경찰서를 돌며 삼겹살 회식을 계획 중이다. 지난 24~25일에는 부산시내 모든 교통경찰을 산타로 변신시켜 운전자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는 이벤트를 벌여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금형 청장은
2006년 연쇄 성폭행범 '발바리' 검거…2011년엔 영화 '도가니' 사건 재수사

1977년 충북 청주 대성여상을 졸업하고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했다. 1982년 경찰청 몽타주 요원으로 발탁되면서 과학수사팀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30년간 아동·청소년·성폭력 등 민생치안과 관련된 업무를 맡았다.

2001년 경찰청 초대 여성정책실장 시절 광명 초등생 성폭행 사건 이후 여경기동수사반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성폭행 피해자 원스톱지원센터, 182 실종아동찾기센터 등을 만들었다. 2004년 성매매특별법 시행 당시 ‘성매매와의 전쟁’, 2006년 마포경찰서장 때는 연쇄 성폭행범 ‘발바리’ 검거, 2011년 광주지방경찰청장 재임 때는 영화 ‘도가니’로 뒤늦게 알려진 광주인화학교 지적장애인 성폭력 사건을 재수사해 14명을 형사 입건했다. 2003년 국가인권위원장상, 2004년 녹조근정훈장, 2009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올해의 여성상 등을 받았다.

최연소 행정고시 합격한 첫째딸
둘째는 하버드대·셋째는 예비 의사
'슈퍼 우먼'의 '엄친딸' 교육법은…

경찰로서 입지전적 승진 기록도 대단하지만 이 청장이 주목받는 이유는 또 있다. 일과 가정을 모두 성공적으로 가꿔낸 ‘슈퍼 우먼’이기 때문이다. 신세계 이마트 부사장을 지낸 남편 이인균 씨와 낳은 세 딸은 모두 ‘엄친딸’이다. 첫째와 둘째는 모두 한성과학고와 KAIST를 나왔다. 첫째는 22세 때 행정고시에 최연소 합격해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고, 둘째는 현재 미국 하버드대에 유학 중이다. 셋째 역시 이화외국어고와 연세대를 졸업하고 현재 치의학전문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슈퍼 우먼이 엄친딸들을 키운 비결을 물었더니 모두 아이들을 돌봐준 시어머니와 시댁 식구들 덕이란다. 재차 물으니 그만의 자식교육법을 일부 들려줬다. “아이들한테 공부하라고 닦달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냥 부모가 공부하면 됩니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잖아요.”

승진 시험이 있는 해에는 주말에 아이들을 사무실에 데려와 공부했다는 이 청장. 자연스럽게 엄마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특히 그만의 독특한 ‘녹음기 학습법’이 아이들에게 통했다는 설명이다.

부산=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