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 카잔차키스의 자유
장마기로 접어든 서울을 떠나 에게해의 크레타로 가는 여정은 멀고 험난했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카타르의 도하를 경유해서 터키의 이스탄불공항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16시간이나 걸렸다. 이스탄불에서 고대도시 유적지를 더듬으며 남쪽으로 1000여㎞를 내려와 마르마리스에서 배를 타고 그리스로 넘어갔다. 그리스 본토가 아니라 로도스라는 섬으로 입항해서 공항으로 이동한 뒤 크레타의 이라크리온 공항으로 떠나는 프로펠러 비행기를 탔다. 한 시간여 만에 크레타의 중심지 이라크리온에 도착했다. 마침내 크레타다!

내가 크레타를 찾은 것은 30여년 동안 마음에 품고 오롯하게 경외하는 한 위대한 작가 때문이다. 스물을 갓 넘긴 청년은 청계천의 헌책방들을 순례하다가 낯선 작가의 단상집 한 권을 손에 넣었다. 청년은 뇌를 움켜쥐는 강렬한 힘에 놀라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세 해 뒤 출판사에 들어간 그에게 새 책의 교정지가 배당됐다. ‘영혼의 자서전’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한 작가의 정신적 편력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다. 많은 여행과 엄청난 사상 편력을 한 끝에 세계적인 작가로 서는 그 작가의 자서전을 읽으며 청년은 심장이 꿰뚫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이런 작가가 있었다니! 그 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었다. 조르바의 거침없는 역동성과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인가.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 따위의 구절에서 오성(悟性)의 자극을 받았다. 청년의 영혼이 전갈이나 원숭이가 아니라 사람이 되도록 키운 것은 어머니, 조국, 기후, 고독, 책들, 니체, 그리고 인간 내면의 신성이 빵과 물과 고기를 사상이나 행동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고 믿었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다. 그 청년은 어느덧 장년이 되었다. 서른 해도 더 전에 나는 그를 만나고, 언젠가 그의 무덤이 있는 크레타를 가보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카잔차키스는 지중해에 있는 수많은 섬 중에서도 큰 섬에 속하는 크레타에서 곡물과 포도주 중개상을 하는 이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 무렵 크레타는 오스만(터키) 제국의 영토였고, 크레타인은 터키의 지배에 저항을 하고 자치권을 얻기 위해 투쟁을 했다. 크레타에서 중등교육 과정을 마친 카잔차키스는 아테네 대학교를 거쳐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길고 긴 그의 정신적 편력이 시작한다.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단테, 붓다, 레닌, 조르바에게서 받은 영감과 깨달음은 그의 피가 되고 살이 됐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것은 60세 때다. 그 소설은 4년 뒤에 파리에서 처음 나온 뒤 영국, 스웨덴,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미국 등지에서 잇달아 번역됐다. 정작 그리스에서는 출판은커녕 작품들이 ‘신성모독’이라는 이유로 그리스정교회는 그를 파문하고 냉대했다. 그는 죽어서도 주검이 공공묘지에 안치하기를 거부당해 이라크리온의 한 언덕에 쓸쓸하게 묻혔다.

올리브 재배지와 포도원들이 있는 구릉 위에 자리잡은 한적한 시골 마을 밀티아의 카잔차키스 박물관을 거쳐 카잔차키스의 묘지를 찾았다. 무덤은 아무 꾸밈없이 단출했다. 두 개의 나무를 가로질러 만든 소박한 나무십자가, 그리고 묘비와 돌로 된 무덤이 전부였다.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이어서 나무십자가가 드리운 그림자가 돌로 된 무덤 위를 가로질렀다. 묘역 주변에는 키 작은 관목들과 새로 심은 야자수들이 바람을 맞고 있었다. 묘비에는 그리스어로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고 씌어 있다. 나는 살아 있을 때 그가 지은 비명(碑銘)을 쓰다듬었다. 나는 격렬하게 요동치는 심장을 억누르며 그 비명의 의미를 곱씹고, 자유가 인간의 존엄성을 담보하는 근본 가치임을, 평생 손에 쥐려고 찾았던 게 바로 그 자유임을 뼛속 깊이 새기며, 두어 시간을 묘지 주변을 거닐었다. 해가 졌다. 어둠이 내렸다. 나는 비로소 카잔차키스의 묘지를 떠났다.

장석주 <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