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벤처펀드 경쟁, 뭐하자는 건가
“정부 각 부처로부터 자신들이 조성하는 벤처펀드에 출자자로 참여하라는 연락이 옵니다. 올해 사업계획에 벤처투자 항목이 없는데, 갑자기 돈을 내라니 곤혹스럽습니다. 그렇다고 새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는 사업을 모른 척할 수도 없고….”

대기업에서 재무관리를 담당하는 한 임원은 “정부의 벤처펀드 출자 권유 때문에 고민이 많다”고 털어놨다. 정부가 잇따라 대규모 벤처펀드 조성계획을 발표하면서 기업들이 과도한 출자부담을 떠안게 됐다는 하소연이다.

일반적으로 벤처펀드는 정부가 자금을 출자하면 민간투자자들이 추가 자금을 더해 결성한다. 예를 들어 정부가 1조원짜리 펀드를 조성하면, 그 가운데 4000억원은 민간에서 조달하는 식이다.

박근혜 정부가 ‘벤처 육성’을 핵심 국정과제로 밝힌 뒤 각 부처가 경쟁적으로 벤처펀드 조성계획을 쏟아내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2조원 규모의 성장사다리펀드를 조성한다고 발표했고, 미래창조과학부는 5000억원 규모의 미래창조펀드 조성계획을 내놓았다. 문화체육관광부도 7500억원 규모의 콘텐츠펀드를 만들 계획이다. 정책금융공사, 국민연금 등도 벤처펀드 출자를 준비하고 있다.

투자재원 확대는 벤처투자업계의 오랜 숙원이었다. 대형 벤처펀드들이 잇따라 시장에 등장하면 벤처생태계는 어느 정도 돈 가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각 부처가 동시다발적으로 펀드 조성을 추진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자금을 대줄 ‘민간투자자’ 확보가 어려워진 게 대표적인 예다. 대기업·금융회사·연기금 등과 같은 민간투자자들은 정부의 벤처펀드 출자 확대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벤처출자에 대한 민간투자자 반응은 하나같이 시큰둥하다. 투자자로 참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지만, 정부가 요청하니 어쩔 수 없이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겠냐는 태도다.

눈치보기식 민간출자가 언제까지 효과를 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세금혜택 등과 같은 유인책을 확대해 대기업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 이유다. 정부 부처별로 ‘실적내기식’ 펀드 조성 계획을 경쟁적으로 쏟아내기보다는 협업을 통해 펀드 규모를 현실적인 수준으로 줄이고 완성도를 높이는 일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오동혁 증권부 기자 otto8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