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물가 상승률이 둔화되는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 조짐이 뚜렷하다. 주요국들이 경쟁적으로 양적완화와 금리 인하를 통해 돈을 뿌렸지만 경기회복은 더디고 물가는 잠잠한 것이다. 미국은 지난달 소비자물가가 전월보다 0.4% 하락, 4년 반 만에 낙폭이 가장 컸다. OECD 회원국 전체의 1분기 평균 물가 상승률은 1.7%(전년 동월비)로 2년 반 만에 최저다. 뒤늦게 금리인하에 나선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물가가 6개월째 1%대 상승에 그쳐 한국은행의 물가목표(2.5~3.5%)의 하단에도 훨씬 못 미친다.

인플레이션 경계감이 희석되자 세계 각국은 금융완화에 더 매달린다. 폴 크루그먼 같은 이들은 정부 재정이 구멍났는데도 지출 확대만이 해법이라고 줄기차게 선동할 정도다. 하지만 디스인플레이션이 돈을 아무리 풀어도 상관없다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최근 물가 안정이 브릭스 등 신흥국 경기침체와 셰일가스 혁명에 따른 에너지가격 하락이 주된 원인이란 점에서 양적완화는 경기부양 효과가 기대 이하였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모든 것이 추락했던 2008년 금융위기 때와 지금의 처방이 같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문제는 풀린 돈이 주가만 자극하는 것이다. 경기 상황과 동떨어진 주가 거품은 반드시 꺼진다는 게 상식이다. 아베 정부 출범 후 65% 폭등한 일본 증시는 최근 사흘새 10% 가까이 주저앉아 롤러코스터를 탄 듯 불안하다. 미국 증시가 사상 최고치로 치달을 만큼 경기회복 징후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수급에 의해 결정되는 상품 가격이 세계경제의 실상을 정확히 보여준다는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지적이 훨씬 설득력 있게 들린다.

비정상이 정상이 돼버린 시대라 해도 원칙에 어긋난 경제정책은 반드시 부작용을 낳는다. 돈 풀어 경제를 살린다는 발상부터가 심각한 후유증을 내포한 극약처방이다. 실물경제의 땀과 노력 없이는 그 어떤 금융완화 정책도 사상누각이다. 국내에선 한국은행이든, 학계든, 경제연구소든 이런 뉴노멀에 대한 연구를 찾아볼 수 없다. 앞으로 닥칠 위험이 뭔지도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 더 큰 위험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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