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유통업체들은 8일 서울시가 주요 신선식품 등 51개를 판매 제한을 권고할 수 있는 품목으로 선정한 데 대해 ‘사실상 장사를 접으란 얘기’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대형마트와 기업형슈퍼마켓(SSM)에서 채소 생선 등 신선식품과 필수 식재료를 팔지 못하게 하면 대형 업체 매장을 찾는 소비자의 발길이 크게 줄어들 것이란 점에서다.

◆납품업체 피해, 소비자 불편 우려

서울시의 판매 조정 방안이 시행되면 대형마트와 납품업체들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을 것이란 지적이다. 서울시가 정한 ‘51개 판매 제한 권고 품목’은 대형마트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다. 지난해 이마트가 이들 51개 품목을 팔아 거둔 매출은 2조2000억원으로 전체의 15.1%를 차지했다. 이마트 관계자는 “시장 현실과 소비자 권익을 무시한 탁상행정”이라며 “대형마트에서 신선식품과 필수 식재료를 팔지 않으면 어떤 소비자가 대형마트를 찾겠느냐”고 항변했다.

납품업체들은 더 큰 피해를 입을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대형마트에 채소 생선 등을 납품하는 업체들은 대부분 연 매출 수십억~수백억원대의 중소기업이다. 매출의 90% 이상을 대형마트에 납품해 거두는 기업도 많다.

이마트에 양파 대파 등을 납품하는 한사랑의 이순희 대표는 “연 매출 200억원 중 90% 이상을 대형마트에 납품해 얻는다”며 “대형마트 납품이 어려워지면 회사는 문을 닫아야 하고 70여명의 직원들은 모두 실업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의 이런 방침은 물가 안정에 역점을 두고 있는 정부 정책과도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김종석 홍익대 경영학부 교수는 “대형마트들이 농수산물을 산지 직매입으로 조달하는 등 유통 단계를 줄여 물가 안정에 기여한 점을 인정해야 한다”며 “비효율적인 유통구조를 그대로 두고는 물가를 안정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대형마트의 물가 안정 기여도는 전날 지식경제부에서 대형마트 임원들을 불러 가격할인 행사를 지속해줄 것을 요청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서울시, “SSM부터 판매 제한 강행”

서울시는 신규 출점하는 SSM에 대해서는 이르면 상반기부터 사업 조정 신청 과정을 거쳐 판매 품목 제한을 강행할 계획이다. 서울시는 다음달 초 이해관계자들과 시민 의견을 수렴하는 공청회를 열고 국회에 법 개정을 건의하는 등 후속 조치를 할 계획이다.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대기업이 사업을 시작하거나 확장할 때 중소기업과 사업 조정 과정을 거칠 수 있다. 대형마트의 경우 중소기업청이 사업 조정 권한을 갖고 있지만 SSM은 해당 시·도가 갖고 있다. 강희은 서울시 소상공인지원과장은 “(시의 권고를) 자율적으로 이행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다만 대형마트가 시의 권고를 거부할 경우 시는 강제 조항을 담은 법률 개정을 중앙정부에 건의하는 등 강력 대응하겠다는 방침이다.

전통시장 상인들은 서울시의 방침을 환영했다. 박태신 서울 중곡제일시장 상인협동조합장은 “대형마트와 SSM이 주요 농수산물을 팔지 않으면 소비자들이 자연히 전통시장을 찾을 것”이라며 “무너져 가는 골목상권을 살리는 실질적인 대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통시장 상인들은 판매 제한이 휴일 및 야간 영업 규제보다 더 강력한 전통시장 보호 대책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 달에 두 차례 있는 휴무일만 피하면 대형마트와 SSM에서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다는 점에서 휴일 영업 규제가 소비자 발길을 전통시장으로 돌리는 효과는 제한적이다. 반면 특정 품목을 대형마트와 SSM에서 팔지 못하도록 하면 소비자는 필요한 것을 사기 위해 전통시장으로 갈 수밖에 없다. 서울시는 채소 수산물 건어물 정육 판매 제한은 전통시장에, 신선·조리 식품과 기호식품은 슈퍼마켓 등 골목상권에 반사이익을 줄 것으로 보고 있다.

유승호/강경민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