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전문가를 만드는 데 몇 년 걸렸어. 1973년부터 만들라고 그랬어. 안 만들어. 1986년에 한 번 더 소리쳤어. 안돼. 회장되고 나서 1988년에 또 떠들었어. 그래도 안돼. 1990년에 고함을 질러버렸어, 사장 회의 때 소리를 질러버렸다고. 그랬더니, 그날로 당장 만들더란 말이야.”

이건희 삼성 회장이 ‘지역전문가 제도’를 만든 과정에 대해 한 말이다. 1년간 업무에서 벗어나 해외에 체류하며 현지를 넓고 깊게 알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이 제도는 인재 양성을 위해 이 회장이 기획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삼성 현지 마케팅의 근간이고, 급성장을 지탱하는 원천이 됐다(2011년 10월6일자)”고 평가할 정도다. 인재에 대한 이 회장의 사랑은 집착이라고 부를 만큼 상상 이상이다.

고교 동창인 홍사덕 전 의원에 따르면 이 회장은 고등학생 시절에도 “나는 사람에 대한 공부를 제일 열심히 한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삼성을 글로벌 인재 허브로

이 회장은 1990년대 중반 사장들에게 ‘5~10년 뒤 뭘 먹고살 것인지’ 보고서를 내도록 했다. 보고서를 읽은 이 회장은 “원하는 답을 쓴 사장은 아무도 없다. 1년 앞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변하는 현실에서 5~10년 뒤를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 해답은 이런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인재를 구하고 키우는 것”이라고 했다. 사장들에게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한 일화다.

이 회장이 인재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현실적이다. 그는 “반도체 라인 1개를 만들려면 30억달러가 드는데 누군가 회로선 폭을 반만 줄이면 생산성이 높아져 30억달러에 버금가는 효과를 거두게 된다. 천재 한 명이 수십만 명을 먹여살린다는 얘기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설명한다.

삼성 인사팀장 출신의 모 사장은 “이 회장의 공은 순혈주의를 타파해 삼성을 글로벌 인재들이 모이게 한 것”이라고 했다. 이 회장은 1993년 신경영 선언 당시 “삼성조차도 상하 간의 학연 지연에 따른 이해가 조직의 이익에 우선한다”고 질타한 뒤 신인사제도를 도입했다. 실적에 따라 보상하는 능력주의 인사였다. 1995년 공채에선 학력 제한을 없앴다. “같은 직급이라도 3배 이상 연봉이 차이 나는 게 일류기업”이라는 이 회장 지시에 따라 2000년부터는 인센티브(PS, PI)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 덕분에 삼성전자 국내 사업장엔 지난해 말 기준으로 1200명의 외국인이 일하고 있다. 박사 학위를 가진 연구인력만 4900명에 이른다. 서울대보다 더 많은 숫자다.

◆창조경영으로 1위 질주

지난해 8월 말 기자가 삼성전자의 한 사장에게 전화를 했더니 미국에서 받았다. 그는 점찍어둔 한 핵심 인재와 만나기 위해 연말 바쁜 스케줄을 다 제치고 미국에 가 있었다. 그 인재는 바로 손영권 현 삼성스트레티지&이노베이션센터 사장이다. 손 사장은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대표적인 한국인으로 메사추세츠공과대(MIT)를 나와 인텔코리아 사장, 퀀텀 아·태 지사장, 애질런트테크놀로지 사장(반도체 부문)을 지냈다. 반도체 설계 회사 ARM의 이사회 멤버이기도 하다. 지난해 9월 입사한 뒤 실리콘밸리의 혁신적 스타트업(신생기업)을 발굴해 공간과 자금, 멘토링을 지원하고 이후 지분투자와 인수를 통해 삼성 제품의 혁신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맡았다.

삼성의 사장들은 이처럼 1년 내내 핵심 인재 영입에 바쁘다. 2002년부터 사장 평가에 월별 핵심 인재 확보 실적이 반영되고 있어서다. 이 회장은 2001년 “앞으로 나 자신의 업무 절반 이상을 핵심 인력 확보에 둘 것”이라고 선언한 뒤 인재 확보가 부진한 사장을 직접 독려하기도 한다.

글로벌 인재에 대한 스카우트는 2003년 6월 이 회장이 “한 명의 천재가 10만명, 20만명을 먹여살린다”며 천재경영론을 제기한 뒤 본격화됐다. 이 회장이 2006년 “삼성만의 고유한 독자성과 차별성을 구현하라”며 창조경영론을 펼치자 인재 확보는 더욱 치열해졌다. 창조경영은 글로벌 1위에 올라 벤치마킹할 만한 기업이 없는 상황에서 미래를 독자적으로 만들어가자는 게 핵심이다.

창조경영의 결실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2006년 삼성 TV를 글로벌 1위로 만든 보르도TV와 2009년 금융위기 속에 초격차를 만든 LED(발광다이오드) TV, 지난해 패블릿(스마트폰+태블릿)이란 새 카테고리를 만들어낸 갤럭시노트 등이 그 예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