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몇 년간 ‘품질경영’을 그렇게 얘기했는데, 변한 게 고작 이것입니까. 사장들과 임원을 전부 프랑크푸르트로 집합시키시오. 이제부터 내가 직접 나섭니다.”

1993년 6월 이건희 삼성 회장의 신경영(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이렇게 시작됐다. 독일 출장을 떠난 그에게 전달된 ‘불량 세탁기 조립과정’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는 삼성이 양에서 질로 전환하는 결정적 단초를 제공했다. 그 후 삼성은 송두리째 변화를 시작했고 반도체 D램, 평판 TV, 스마트폰 등 삼성 제품은 속속 세계 1위에 오르게 된다.

○불량품을 불태우고 전진하다

이 회장은 1987년 그룹 총수에 오른 뒤 지속적으로 ‘품질경영’을 주문했다. “세계일류가 되면 이익은 지금의 3~5배 나게 돼있다. 1년간 회사 문을 닫더라도 제품 불량률을 없애라”고 했지만 삼성 조직은 꿈쩍하지 않았다. 1960~1970년대 만들기 바쁘게 팔려나가던 시절을 보낸 삼성 경영진엔 ‘어떻게든 많이 만들면 된다’ ‘양이 최고다’란 인식이 뿌리깊었다.

품질경영은 두 가지 사건을 통해 전파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사건은 프랑크푸르트 선언 당시 발생했다. 1993년 6월15일 이 회장이 “소비자한테 돈 받고 물건 내 주는데, 불량품 내주는 게 미안하지도 않은가”라며 사장단에 10여 시간이 넘는 강의를 끝낸 뒤였다.

당시 이수빈 비서실장이 여러 사장과 함께 이 회장 방을 찾아왔다. “회장님, 아직까지는 양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질과 양은 동전의 앞뒤입니다.” 그 순간 이 회장은 손에 들고 있던 티스푼을 테이블 위에 던지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참석자들은 얼굴이 새하얘졌다. 이른바 ‘티스푼사건’이다.

두 번째는 유명한 ‘불량제품 화형식’이다. 1994년 삼성전자 무선전화기 사업부는 무리하게 제품 출시를 서두르다 불량률이 11.8%까지 치솟았다. 1995년 1월 이 회장은 불량품을 무조건 새 제품으로 바꿔줄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3월9일 수거된 15만대의 전화기를 구미사업장 운동장에 쌓았다. 2000여명의 임직원이 지켜보는 앞에서 해머를 든 10여명이 전화기를 내리쳤고, 산산조각난 전화기를 불구덩이에 던져넣었다. 잠자는 사람에게 찬물을 한 바가지 끼얹는 일종의 폭력이자 충격요법이었다.

“제품이 불타는 것을 보니 여러 감정이 교차하더군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은 재를 불도저가 밀고 갈 때쯤 갑자기 각오랄까, 결연함이 생깁디다. 그 불길은 과거와의 단절을 상징한 겁니다.” 당시 무선사업부 이사였던 이기태 전 삼성전자 사장의 말이다. 1994년 4위에 그쳤던 삼성 무선전화기의 국내 점유율은 1995년 19%로 1위에 올랐다.

○질좋은 제품에서 ‘혼’을 담은 제품으로

품질경영이 자리잡기 시작하자 이 회장은 이를 넘어 제품에 ‘삼성의 혼’을 담을 것을 주문한다. 1996년 “다가올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다. 기업 디자인은 기업의 철학과 문화를 담아야 한다”며 디자인혁명을 선언했다. 삼성디자인학교(SADI)가 개원했고, 2001년 삼성전자엔 최고경영자(CEO) 직속의 디자인경영센터가 설립됐다.

이 회장은 2005년 사장단을 디자인 중심지인 이탈리아 밀라노로 불러 ‘제2 디자인혁명’을 주문하며 “삼성 제품의 디자인 경쟁력은 1.5류다. 제품이 소비자 마음을 사로잡는 시간은 평균 0.6초인데 이 짧은 순간에 고객을 붙잡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디자인경영의 성과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나타났다. 2006년 ‘와인잔’ 모양의 테두리 디자인을 갖춘 보르도 TV는 일본 소니를 넘어 삼성 TV가 글로벌 1위에 자리매김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지난 6월 영국 런던 얼스코스전시장에서 공개한 갤럭시S3는 뛰어난 디자인으로 찬사를 받았다. 삼성전자는 세계 3대 디자인상인 독일의 ‘레드닷’과 ‘iF’, 미국의 ‘IDEA’ 상을 휩쓸었다. IDEA에서 최근 5년간 누적수상 1위를 차지했으며 iF에서도 3년간 누적수상 1위를 지키고 있다.

이제 이 회장은 소프트 기술로 눈을 돌리고 있다. 지난해 7월 삼성전자 사장단에 “소프트웨어 디자인 서비스 등 소프트 기술이 중요해지고 있다”고 역설했고 8월 구글의 모토로라 인수 소식을 듣고는 “IT 파워가 하드웨어 업체에서 소프트웨어 업체로 넘어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소프트웨어직군(S직군)’을 신설하고, 채용 인원을 크게 확대하고 있다. 올 9월 말 현재 소프트웨어 인력은 3만2000명, 디자인 인력은 3000명에 달한다. 웬만한 대기업 규모다. 국내에 소프트웨어센터, 미국 실리콘밸리엔 제2미디어솔루션센터(MSC)를 설립했고 올해 미국 벤처업체인 엠스팟을 인수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 ‘소프트 드리븐 컴퍼니(Soft Driven Company)로의 변신’을 선언했다. 앞선 하드웨어 기술에 소프트 기술을 접목시켜 애플, 구글과 같은 소프트웨어 중심의 회사와 글로벌 IT 패권을 겨뤄보겠다는 구상이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