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산음료 용량이 커진 것은 고객들이 원해서가 아니다. (더 많이 팔기 위한) 기업들의 전략일 뿐이다.”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70)이 최근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블룸버그 시장은 최근 대용량 탄산음료 판매를 규제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설탕이 들어간 용량 16온스(약 480㎖) 이상의 음료를 음식점과 영화관, 야구장 등에서 팔지 못하게 하는 내용이다. 이 정책이 논란을 불러일으키자 트위터를 통해 정면 돌파에 나선 것. 논란을 빚을 줄 뻔히 알면서 이런 정책을 내놓은 이유에 대해 그는 “비만 퇴치는 시민이 바라는 정책”이라고 잘라 말했다. 뉴욕시민들이 성인 비만의 주범으로 지목된 탄산음료 섭취를 줄일 수 있다면 웬만한 비판은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탄산음료 판매 제한은 블룸버그의 철학을 보여주는 대표적 정책이다. ‘시민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 정치.’ 2001년 처음 시장에 당선된 뒤 추진한 정책은 공공장소 금연이었다. 공화당 소속으로 뉴욕시장에 올랐지만 당이 시민의 이익보다 당파적 이익을 우선시한다고 판단한 순간 과감히 당적을 버리기도 했다. 뉴욕시민들은 블룸버그의 정책을 지지했다. 확고한 양당 체제인 미국에서 무소속으로 3선(選) 시장이 된 비결이다. 이제 사람들은 그를 미래의 대통령 후보로 꼽는다.


○“나의 고충을 해결하라”

1981년 초 블룸버그는 잘 나가는 월스트리트의 금융인이었다. 1966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졸업 직후 투자은행 살로먼브러더스에 입사한 그는 7년 만에 파트너에 올랐다. 초고속 승진이었다. 하지만 그해 실업자 신세로 전락했다. 경기 침체가 심각해지자 회사는 어느 날 그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서른아홉 나이에 청춘을 바친 회사에서 하루 아침에 쫓겨난 것이다.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았다. 위기를 기회라고 생각했다. 퇴직금 1000만달러로 창업에 나섰다. 그는 창업 아이템을 멀리서 찾지 않았다. 월스트리트 트레이더로 일하면서 스스로 느낀 불편함을 해결하기로 한 것. 그가 현업에서 활동한 1960~1970년대에는 인터넷이 상용화되지 않았다. 대형 증권사도 과거 정보를 보려면 월스트리트저널 등을 일일이 뒤져야 했다. 거래 시스템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트레이더로 일할 때 느꼈던 자신의 고충을 해결하면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컴퓨터와 금융정보를 결합, 월스트리트가 필요로 하는 금융정보 시스템을 개발하기로 한 것. 당시로선 말 그대로 혁신적인 창업 아이디어였다. 회사 이름을 ‘혁신시장 시스템(Innovative Market Systems)’이라고 지었다. 이 회사가 ‘정보의 제국’으로 불리는 블룸버그통신으로 성장했다.

창업한 이듬해인 1982년 메릴린치증권으로부터 첫 번째 주문을 받았다. 메릴린치가 이용하는 시스템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블룸버그는 승승장구했다. 월스트리트를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채권 관련 데이터로 시작한 사업을 주식, 뮤추얼펀드, 상품선물과 옵션 500만개에 달하는 금융상품으로 확장했다. 1990년에는 뉴스 서비스를 내놓았다. 뉴스 서비스도 통신에서 TV, 라디오 등으로 영역을 넓혀 나갔다. 거대 미디어 그룹으로 거듭난 것이다. 현재 전 세계에 설치된 블룸버그 단말기는 30여만대에 이른다. 전 세계에서 실시간 뉴스를 전하는 기자만 2300명이다.

○“해고된 사람도 무료로 쓰세요.”

“소중한 사람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하라.” 블룸버그의 좌우명이다.

2006년 95억달러를 운용하던 아마란스어드바이저라는 헤지펀드가 파산했을 때 일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이 회사에서 해고된 221명의 직원들에게 무료로 단말기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블룸버그통신 사용료가 비싸 해고자들이 개인 돈을 내고 이용하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해고자 중 180명이 몇 개월 사이 새로운 직장을 얻었다.

블룸버그통신이 제공하는 정보를 활용해 감각을 잃지 않은 덕분에 수월하게 새 직장을 얻을 수 있었던 것. 이들이 블룸버그의 팬이 된 것은 물론이다. 취업 조건 중 하나로 블룸버그 서비스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할 정도였다. 블룸버그는 CEO로 재직할 때 이런 제도를 만들었다.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제도였다. 1981년 갑자기 해고당했을 때 회사에서 받을 수 있는 서비스가 얼마나 절실했는지 기억해냈던 것이다.

블룸버그는 2001년 뉴욕시장에 당선된 뒤에도 좌우명을 잊지 않았다. 800만명 이상의 시민을 소중한 고객으로 삼은 것. 시민 생활 속에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그는 당선 이후 지금까지 지하철로 출퇴근하고 있다. CEO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한 비결이다. 그는 공약 대부분을 지켜 ‘역사상 가장 인기있는 뉴욕시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블룸버그 취임 당시 뉴욕시 재정은 적자 상태였다. 그는 그러나 재정 건전화를 위해 시민에 대한 서비스를 희생양으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서비스를 계속 확대했다. 부족한 재정은 재산세 인상과 관광 수입으로 채웠다. 이를 위해 취임 직후 대대적인 뉴욕 알리기에 나섰다. 코카콜라와 월트디즈니의 마케팅을 담당했던 전문가 조지 퍼티타를 고용하고, 전 세계 주요 도시에 뉴욕 홍보 사무실을 열었다. 뉴욕의 관광자산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뉴욕 경제를 살리고 재정도 튼튼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2002년 3500만여명이던 뉴욕 관광객은 지난해 5000만명을 돌파했다. ‘뉴욕의 CEO’가 된 그는 시 운영에서도 타고난 사업가 기질을 발휘한 셈이다.

○위기 속에서 빛난 리더십

2011년 8월 말 허리케인이 미국을 강타했다. 뉴욕도 사정권에 들 것이라는 예보가 나왔다. 8월27일 블룸버그 시장이 TV 생중계 출연을 자청했다. 그는 “당장 떠나십시오. 허리케인이 다가올 때는 이미 늦습니다. 대피하지 않는다고 벌금을 부과하거나 체포하지는 않겠지만, 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맨해튼 남부 저지대와 브루클린 퀸스 일부 지역 주민 37만명에게 강제 대피명령을 내린 것이다. 의무 대피명령이 내려진 것은 뉴욕시가 생긴 뒤 처음이었다.

시는 8337편의 항공편을 모두 취소했다. 5개 공항의 항공편 착륙도 전면 중단시켰다. 지하철과 버스도 운행하지 못하게 했다. 자연재해로 인한 첫 운행 중단이었다. 450만가구에 대한 전력 공급도 끊었다. 핵발전소 2곳의 가동도 중단시켰다. 이 명령도 논란이 됐다. “굳이 도시를 마비시킬 필요가 있느냐”는 반론도 나왔다.

이틀 뒤인 29일 허리케인 아이린이 미국 동북부를 강타했다. 그러나 뉴욕시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철저히 대비한 덕분이었다. 과학자들은 아이린이 지나간 뒤 뉴욕시의 대응이 뛰어났다고 평가했다. 재난에 대비하는 ‘최고의 교과서’라는 분석도 나왔다. 블룸버그는 재난시 취해야 할 조치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했다. 시민의 안전이 1순위였던 것. 그리고 이를 단호하게 실행했다. CEO로서 수많은 위기를 극복한 그의 리더십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성공한 CEO이자, 3선 뉴욕시장인 그를 ‘미국의 새로운 행동 영웅(Action Hero)’이라고 표현했다. 비즈니스위크는 ‘공공 서비스의 새로운 모델을 창조하고 있는 CEO형 시장’이라고 평가했다. 요즘도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과 공화당이 무소속인 그를 영입하기 위해 구애 작전을 펼치고 있다. 민주당 소속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행정부 핵심 관료들과 함께 하는 골프에 초대했다. 경쟁자인 공화당의 미트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는 그의 자선재단 사무실을 찾아가 “한수 배우러 왔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전설리 기자 sl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