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의 ‘돈 풀기’ 전략이 가격 인플레이션만이 아니라 전방위적인 인플레, 즉 ‘팬플레이션(panflation)’을 야기하고 있다고 이코노미스트지가 6일 보도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여성 바지 사이즈가 기업의 마케팅 전략에 따라 과거 10 사이즈는 현재 14로, 14 사이즈는 18로 늘어난 ‘사이즈 인플레’를 그 사례로 들었다.
- 4월 6일 연합뉴스

경제위기와 '팬플레이션'

[강현철의 시사경제 뽀개기] 학점· 직급 '부풀리기'…지구촌 전방위 인플레 현상 뚜렷
☞ 언어는 시대를 반영한다. 새롭게 나타난 용어(用語)나 조어(造語)는 시대상이 투영된 경우가 많다.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 남유럽 재정위기국을 뜻하는 ‘돼지들(PIGS) 국가’나, 국제 농산물 가격 급등으로 인해 야기된 인플레이션을 의미하는 ‘애그플레이션’ 등이 그 예다. 영국 주간 경제지 이코노미스트(Economist)가 만든 ‘팬플레이션(panflation)’도 앞으로 자주 사용될 것으로 보이는 신조어다. 이코노미스트는 최신호(4월 7일자)의 ‘팬플레이션의 위험(The perils of panflation)’이라는 기사에서 이 용어를 처음 선보였다.

‘팬플레이션(panflation)’은 ‘넓은’, ‘범(汎)’ 등을 뜻하는 ‘팬(pan)’과 물가의 전반적 상승을 의미하는 ‘인플레이션’을 합친 말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인플레가 넘쳐나는 현상이다. 팬플레이션의 특징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치기준이 평가절하되는(낮아지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여러 사례를 들고 있다. 호텔에선 과거 5성급 호텔이 최고급 호텔을 의미했지만 이젠 6성급·7성급 호텔이 등장하고 있다. 호텔들이 마케팅 수단으로 등급을 부풀린 데 따른 것이다. 호텔 룸 등급도 과거 딜럭스(Deluxe)급은 보통(standard) 수준으로 떨어지고, 이제는 럭셔리(luxury), 슈퍼 럭셔리(superior luxury), 그랜드 슈퍼 럭셔리(grand superior luxury) 등으로 인플레됐다. 또 적지 않은 항공사들은 ‘이코노미’석을 제공하지 않는다. 브리티시항공과 에어프랑스는 ‘이코노미석’ 대신 ‘월드 트래블러’와 ‘보이저(Voyageur)’석을 내놓았다.

학점 인플레도 팬인플레이션의 한 사례다. 영국에서 학생들의 학력 수준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는데도 ‘A등급’을 받는 학생의 비중은 지난 25년 동안 9%에서 27%로 확대됐다. 영국 더럼대학 조사에 따르면 오늘날의 ‘A등급’은 1980년대의 ‘C등급’과 같은 수준이다. 미국의 경우에도 대학 졸업생 가운데 약 45%가 ‘A등급’을 받지만 1960년에 그 비중은 15%에 불과했다. 한국의 대학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학점 인플레는 높은 학점을 받은 학생들의 자존심을 높여주기도 하지만, 정말 우수한 학생들에겐 불공평한 일이기도 하다. 직장에서도 최고책임자(chief)나 이사(director) 등을 일컫는 직급들이 넘쳐나는 직급 인플레 현상이 나타난다. 더 근사한 이름의 직급을 부여하는 데 드는 비용이 임금을 올려주는 비용보다 낮기 때문이다.

의류에도 일정 사이즈에 해당하는 실제 옷의 크기가 점점 커지는 ‘사이즈 인플레’를 찾아볼 수 있다. 현재 영국의 여성용 바지 사이즈 14의 허리둘레는 1970년대 같은 사이즈의 바지에 비해 4인치 이상 더 크다. 의류회사들이 날씬하길 원하는 여성들이 더 작은 사이즈의 옷이 몸에 맞을 때 지갑을 열 것으로 보면서 사이즈 인플레가 일어나고 있다. 식품 용량에도 인플레가 엿보인다. 피자는 스몰(small) 사이즈가 사라지고 레귤러(regular), 라지(large), 베리 라지(very large)로, 커피는 톨(tall), 그란데(grante), 벤티(venti)에 이어 곧 트렌타(trenta) 사이즈까지 나올 처지다. ‘스몰’ 사이즈는 금기어가 됐다.

경제적 인플레이션이 정보를 모호하게 만들며 상대가격 변화를 통해 경제를 왜곡시키는 것처럼 팬플레이션도 여러 부작용을 낳는다. 소비자들로선 같은 돈을 내고서도 예전보다 질 낮은 상품이나 서비스를 감수해야 한다. 학점 인플레나 직급 인플레는 인재 선발과 급여수준 책정 등을 어렵게 해 고용시장을 불투명하게 만들 가능성도 있다. 사이즈 인플레나 식품 인플레는 소식(小食)을 위한 동인을 줄여 체중 감량을 어렵게 만든다.

[강현철의 시사경제 뽀개기] 학점· 직급 '부풀리기'…지구촌 전방위 인플레 현상 뚜렷
칼 오토 포헬 전 분데스방크(독일 중앙은행) 총재는 인플레이션을 “짜내기는 쉽지만 다시 넣기는 힘든 치약”에 비유한 적이 있다. 인플레가 한번 발생하면 치유하기가 극히 어렵다는 얘기다. 어떤 여성이 14 사이즈에서 18 사이즈로 돌아가는 걸 기뻐할 것인가.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 극복을 위한 각국 중앙은행들의 ‘돈 풀기’ 전략이 초래한 사회 전반적인 ‘부풀리기’를 걷어내려면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군살과 싸울 수밖에 없다.

강현철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hc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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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산업까지 세계 최고로 키우려는 중국의 야심

QFII와 중국의 금융시장 개방

중국이 외국인의 증권투자 한도를 세 배 가까이 확대키로 했다. 중국 증권감독관리위원회는 3일 적격외국인투자가(QFII) 투자 한도를 현재 300억달러에서 800억달러로 500억달러 늘린다고 발표했다.
- 4월 4일 한국경제신문

[강현철의 시사경제 뽀개기] 학점· 직급 '부풀리기'…지구촌 전방위 인플레 현상 뚜렷
☞ 중국이 금융시장 개방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다. 수출 중시와 중화학 공업 육성 등 대한민국의 경제발전 전략을 따라하고 있는 중국은 금융시장 개방도 과거 한국이 했던 방식을 뒤따르고 있다. 단계적인 개방을 취하면서 자국 내 금융회사를 키우는 전략이 그것이다.

한국처럼 외국인의 금융시장 투자가 자유로운 나라들과는 달리 외국인이 중국 시장에 투자하려면 중국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적격외국인투자가(QFII, Qualified Foreign Institutional Investor)는 적절한 자격을 갖춘 외국인에게만 중국의 주식이나 채권을 살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다. 외국인이라면 QFII를 따야만 중국에 투자할 권한이 생긴다. 중국 정부는 자국 금융사들이 해외에 투자할때도 QDII(적격 국내기관투자가, Qualified Domestic Institutional Investor) 자격을 갖추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이처럼 국내외 금융시장 투자를 까다롭게 제한하는 것은 외환 유출입을 적극 통제, 국제 투기자본이 경제를 교란하는 걸 막기 위한 것이다.

중국의 주식은 크게 A주식과 B주식으로 나뉜다. A주는 원칙적으로 중국인만이 투자할 수 있으며 외국인은 B주만 투자할 수 있다. 단 QFII를 획득한 외국인 투자자라면 A주에도 투자 가능하다. QFII 제도는 2007년에 100억달러 한도로 처음 도입된 뒤 작년에 300억달러로 확대됐다. 현재 QFII 자격을 획득한 기관투자가는 23개 국가의 158개 기관으로, 이 가운데 129개 기관이 중국 당국으로부터 246억달러의 투자한도를 확보하고 있다.

외국 자본을 엄격하게 통제해온 중국 정부가 QFII 투자 한도를 늘리기로 결정한 것은 자본시장의 국제화와 질적 향상을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원자바오 총리는 이달 초 “국영 은행들이 엄청난 폭리를 취하는 것은 경쟁이 없는 독점 때문”이라며 “민간 금융회사 설립을 확대해 은행의 독점시스템을 타파할 것”이라고 밝혔다. 시장개방을 통해 국내외 금융사를 경쟁시킴으로써 중국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리겠다는 뜻이다. 중국은 지난 2월 향후 10년간 3단계에 걸쳐서 금융시장을 개방한다는 청사진도 내놨다. 1단계로 중국 기업의 해외투자를 확대하고 2단계로 위안화의 국제화를 추진하며, 3단계로 중국 금융시장의 국제화를 강화하고 점진적으로 개방한다는 전략이다. 개방 순서는 부동산, 주식, 채권 시장 순이다. 제조업에 이어 금융산업도 세계적인 수준으로 키우겠다는 중국 당국의 의지가 깃들어 있다.